2013년 2월 25일 월요일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 (출34:29-35)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께서 주신 두 돌판에 새겨진 언약판을 들고 내려오던 모세는 산 아래서 벌어지는 우상숭배의 광란하는 소리를 듣고 그 노를 참지 못하여 산 아래로 돌판을 던지어 그 돌판은 깨어져 버린다. 하나님이 친히 만드시고 친히 쓰신 돌판 ! 하나님이 언약을 주시는 순간에 이스라엘은 언약을 깨는 행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장면처럼 오버랩 되어 나타난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 당하는그 순간에 예수를 배반하고 도망하는 제자들의 모습처럼………… 그러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다시금 부르시고 그들을 위해 새로운 언약판을 주시기로 작정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에는 그 돌판을 모세가 깍아서 만들었다는 점이다. 성전의 모퉁이돌 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에서 그 몸이 깨어지셨던것처럼,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깨어진 그리스도몸, 모통이돌 되신 그 돌판위에 언약을 새기셨던 것처럼 말이다. 모세는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서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 하였던 것이다. 그 때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였다고 말씀 하신다. (출34:28) 모세의 이 장면은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어 사십일 동안 금식을 하시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교제 하시는 장면과 흡사한 모습을 지닌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모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모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일 것이다. 40일간의 차단된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모세는 과연 하나님을 어떻게 뵈었을 까? 왜 하나님은 모세에게만 그런 특별한 시간과 경험을 허락하신 것일까? 아마도 모세의 당돌한 기도를 주의해 볼 필요가 있는 듯 하다. 모세는 출33:18에 “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 라고 기도한다. 모세의 간절한 열망은 더 큰 능력이나 권세, 지혜도 아니었고 그의 간절한 열망한 여호와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예배자의 기도가 아닌가? 모세는 자신의 위치와 신분을 깨달았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놓치어 버린 인간의 참 된 위치와 신분이 무엇인지를 너무나도 잘 간파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을 구함으로서 그는 인간은 예배자로서 그 분 앞에 서 있을 때 비로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는 비밀을 깨달은 듯 하다. 모세가 돌판을 받아 들고 산에서 내려올 때 사람들은 모세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놀라기 시작한다. 29절에 보니 “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으므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의 빛은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투영 되어지는 영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얼굴에 나는 광채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그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 이것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최초의 속이는자 사단이 끊임없이 구하였던 원초적인 죄가 아니었던가? 사역자에게서 빠지기 쉬운 함정이요 만일 우리가 영적인 지도자이면 일수록 더 깊은 유혹가운데 우리가 빠질 수 있음을 우리는 모세를 통해서 발견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 때문에 자신을 두려워하고 신비하게 여기는 것을 눈치챈 모세는 사람들을 만날 때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웁니다. 막9:1-8 십자가로 가시기전 예수님은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르로가 보니 예수님의 광채가 너무나 빛이 나서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영광이 예수님에게 드리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영광 자체이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 하였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모세에게는 그 말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광 그 자체셨던 것입니다. 요1:14 “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 이셨던 것입니다. 모세가 얼굴을 가리운 것은 그것은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의 역할,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Reflection) 광채라는 사실을 모세는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모세의 이 영광은 장차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오고 나타날 모습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롬8:18 바울은 “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후4: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는 장차 성도들이 주님의 나라에 임할 때 진리되신 하나님을 뵙게 될 때 나타날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 자기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여화와와 말한 것으로 인해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땅의 성도들에게 진정한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모노로그가 아니라 다이로그적인 예배 인 것입니다. 행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는 예배 할 때에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사야가 예배 할때에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여호와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모세의 기도가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우리가 마음으로 주님 앞에 부르짖을 때에 우리에게 임하시는 여호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얼굴에 광채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예배자 입니까?

2013년 2월 24일 일요일

안식일의 규례에 관하여

" 안식일에 대한 규례에 대하여....." 출 31:12-17 히브리 말로 안식이라는 단어 " Shabbat " 는 중단하다, 중지하다. 멈추다. 그리리고 쉬다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창조의 이야기 가운데서 하나님은 일하시고 쉬셨다. 창 2:1-2 하나님의 창조의 일은 우연히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다. 그 분은 6일간 창조의 일을 하셨고 7일째 되는 날 온전한 쉼을 가지셨던 것을 보게 된다. 쉼의 날 이었던 제 7일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을 보게 되어 진다. 구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모세의 법" 즉 십계명을 받기 전까지는 안식일에 대한 규례는 법으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성경은 모세가 계명을 받기 이전부터 하나님은 곳곳에서 이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하셨던 것을 보게 된다. 노아를 통한 인류의 구원의 역사 뒤인 창 8:21 그리고 9:1-17 절에도 안식일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안식일은 메시아의 새로운 왕국에 대한 예언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 56:6-7 그리고 겔 44:24, 사 66:22-23 에서도 언급 되어 지는데 놀라운 것은 메시야의 왕국에 대한 예언은 항상 하나님의 율법과 연되되어져 있는데 안식일은 새로운 메시야의 왕국에서도 기억 되어 진다는 점이다. 겔 46:1,3, 아모스 8:5 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되어 지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 출 31장 12-17절에 나타난 모세에게 명하신 율법을 묵상하면서 주님이 깨닫게 해주신 하나의 영감은 바로 안식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일 뿐 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의 정체성이었다는 것이었다. v12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데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v17......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으니라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 가운데 주변의 이방인들과 함께 살면서 이들이 여호와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구분 짓게 하는 놀라운 표징은 사실은 바로 이들이 하나님이 쉬셨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구별되어졌다. 세상의 사람들이 7일을 쉴새없이 일하고 있을 때 이들은 6일이 지난 시점으로부터 그들이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허락하신 안식 가운데 들어 간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신앙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안식일은 여호와의 샬롬과 더불어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을 보게 되어 진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대부분의 사역에 있어서도 주님의 말씀의 대부분이 바로 안식, peace and rest 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평안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부활하신 주님의 첫번째 메세지이다. 요19:30 '주님은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 하셨다. 이 말은 값을 다 지불하였다 라는 말씀 이시기도 하시지만 주님의 죽음후에 주님의 영혼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서 안식하셨다. 마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6일동안 창조의 일을 다 마치셨던 것처럼 주님의 구속의 사역은 6일의 창조의 역사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으셨던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의 완성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이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것이다. 일을 마치기 전에는 우리에게 안식이 없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 하셨던 것처럼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 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안식할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과 안식에 대한 개념 약속을 이야기 하면서 모세에게 준 안식의 개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완벽한 구원의 완성과 이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는 영원한 안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 그가 말씀 하신 바와 같이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 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을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 하셨으므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 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v9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4:3-13) 오늘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을 안식일을 통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삼으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유일한 언약의 표징은 바로 그리스도가 일을 마치신 그 구원의 역사 가운데서 주님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 하심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는 일인 것이다. 쉼(Rest), 평강(Peace), 여화와의 샬롬이 우리 안에 이루어 질때 비로서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가 전하는 복음의 기독교는 " 노력과 행위"의 종교가 아니라 구원의 완성과 쉼의 종교인 것이다. 만일 우리 안에 여전히 주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끊임없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일하고 있다면 여전히 우리는 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가 되는 것이다. 안식은 다 이룬자가 누리는 날인 것이다. 안식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다 마치신 일을 바라보고 그의 안식 안에서 내가 나의 일을 멈추고, 중단하고 그 분이 주신 은총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거룩하여 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표지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다 마치시고 온전히 이루신 그 일 안에서 안식하며 평강을 소유하게 될 때 그 평강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지가 되어 살아 간다는 것이다. 당신은 안식하고 계십니까? 히브리서의 표현으로 라면 당신은 지금 안식 가운데

나보다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

" 나보다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 ?" 요즘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일반적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는 교회나 종교그룹에 속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일반의 그룹들 가운데서 더 강한 "영성계발" 또는 "영성추구"의 현상이 나타 난다는 점이다. 전통적 기독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유럽에서는 탈 기독교화된 서구인들의 " 진리를 향한 아니 더 정확히 표현 한다면 진리를 경험" 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추구들이 " 비서구적, 비헬레니즘적인 동양철학과 신비주의"에서 찾으려는 진기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티벳의 종교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설법을 듣기 위해 서구문명의 상징적인 보루인 미국과 유럽에서 수 만명의 사람들이 운집하는 기이한 현상도 오늘날의 시대가 물질문명이 아닌 "영성의 시대"에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단편적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영성의 세계, 아니 기독교가 성서의 본질을 잃어 버리고 교의적인 기독교로 머무르며 생명의 본질이 없는 문화와 교회의 전통으로 변질해 가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생명의 본질이 빠진 하나의 도그마틱한 때로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기도 해 보이는 전통화된 메세지에서가 아니라, 말씀의 현존이 있는 진정한 영성의 경험을 그토록 목말라 하고 추구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진리와 오늘날 교회가 외치는 진리가 동일한 것이라면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안에서 경험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잃어 버린채 살아 있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자" 라고 진단한 성령의 음성을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라고 바라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바울은 살전1:5 절에서 "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라고 말한다. " 능력과 성령" 그것은 오순절 사건이후 사도들, 주의 제자들이 증거하는 말씀 가운데 나타난 진리의 체험,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생명력 있는 신앙의 고백 안에 있었던 교회의 상징이자 표지 였었던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추구하는 영성에도 그들이 갖는 궁극적인 질문과 더불어 시작되어 진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가? 두가지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존재론적인 질문에 대한 응답을 찾을 때 비로서 우리는 영적인 세계에 맞닺게 되어지고 살아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29:13)모세가 하나님을 만날때 당신을 누구라고 말해야 하나요? 라는 질문 앞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라고 말씀 하신다. 모세는 자신을 부르는 하나님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3:4) 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누구인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한 가장 정확안 응답은 " 내가 나의 현존 가운데서 내가 누구인가?" 라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될때 출발하게 되어진다. 하나님의 동산에서 스스로 지혜를 구하였던 인간이 오히려 잃어 버렸던 "나의 진정한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자신의 어두운 구석을 바라보게 될 때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 닫게 되어지고 그 은총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고 말씀 하셨다.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영성의 추구는 본질적인 진리안에 감추어져 있고 이 진리를 깨닫는 순간에 인간은 비로서 우리가 잃어 버리고 그럼으로 우리가 갖혀 있던 우리를 가리우는(Blind to the truth) 어움으로 부터 자유케 되어 지는 것이다. 수많은 현인들이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간절한 구도와 그들의 영성의 세계를 구축하여 왔다. 우리는 이제 " 오직 예수로만" 이라는 도그마틱한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궁극적으로 예수를 통하여 만" 이라는 새로은 길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 진리를 알지니.......라고 말씀 하시던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현존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온전한 현존 안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생명이니 ....(요14:6)" 라고 말씀 하시며 가장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진리의 기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다. 빛이 비추이기 전에는 우리는 내가 어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어린시절 찢어진 문틈 사이로 빛이 비추어 들어올 때 얼마나 많은 먼지들이 내가 호흡하던 그 방안에 있었는지를 비로서 보게 되는 것처럼......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지각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 우리에게 비추이게 될때 비로서는 우리는 나의 추하고 어두운 모습들과 그리고 나에게 그 분의 은총이 없이는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지는 것이다. 우리가 나의 절망의 끝 가운데 서 있을 때 비로서 그 끝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보게 되고 그 은총을 통하여 주시는 나로부터의 구원(죄로 부터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고 비로서 우리는 나의 현존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것을 가장 황홀한 영적경험의 순간 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그것을 "참된 예배" 라고 부르는 것이다. 구약의 성서인 이사야 6장을 읽노라면 우리는 이사야의 현존적 경험을 읽는다. "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주 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정직한 나의 현존을 만나는 경험이 없는 모든 영적인 체험과 " 나에 대한 앎" 은 기만이요 나를 더욱더 나로부터 분리시키는 혼돈스러움이요 결국은 인간은 그 지식과 앎을 인하여 파멸하게 되고 멸망하게 되어 지는 것이다. " 나는 누구인가" 정직하게 질문하고 반복하여 질문하라..........그 질문의 끝에서 당신은 비로서 영광스런 현존으로 항상 살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어 질 것이다. " 그 깨달음의 순간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고 그 분이주시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어느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차를 길가에 세우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땀을 흘리며 고치고 있었다. 그 때 고급 리무진을 탄 80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운전자에게 묻는다. " 무슨 일인가 젊은이 혹 도움이 필요한가?" 그러자 운전자는 노인을 보고 갖잫다는 듯이 아닙니다. 잠시 자동차를 손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해결 하지요?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3시간이 넘도록 이 운전자는 여전히 문제를 찾지 못하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후 노인이 일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이 운전자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운전자에게 젊은이 도움이 필요함애기 하게나....무엇인 문제인가? 라고 친절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운전자는 여전히 빈정거리는 말투로 할아버지가 어떻게 도와 주실수 있는데요? 라고 말을 하였다. 그러자 이 노인은 차문을 열고 내리며 이 운전자에게 친절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젊은이 나는 헨리 포드라고 하네....사실은 내가 이 차를 내가 만들었거든 그러니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걸세 그리고 노인은 얼마 안되어 자동차를 고쳤고 다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게나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 오늘 내가 나를 찾는 진정한 영적 순례를 하고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나를 그 분의 형상으로 만드신 그 분앞에 돌아올 때 인 것이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그 분께 나를 보여줄 때 그 분은 나의 거울이 되어 줄 것이다

하나님의 뜻 을 돌이키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 기도“ (출32:7-14) - 참 된 지도자의 요건- 430년의 애굽으로부터의 억압을 끝내고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위대한 해방자 모세, 모두가 그들이 섬기던 하나님의 이름조차 잊어 버리고 있었을 때 하나님을 대면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사람, 하나님을 대리하여 모든 권능과 이적을 행함으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던 지도자, 그들의 누나와 형들에게도 리더십을 발휘하던 그런 강력한 지도자 였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소위 말하는 “이상적인 지도자”에 대한 나름의 지도자론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역사속에 존재하는 많은 지도자들 가운데 참으로 독보적인 지도자가 아닐 수 없다. 거기다가 강력한 이사와 기적을 행하는 초능력적인 권위와 권세까지 있었으니 그를 추종할 다른 지도자가 어디 있을까? 첫번째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소명을 운명적으로 인식한 소명의 지도자였다. 그의 생애가 한편의 드라라였고 그는 히브리인이면서 애굽왕 바로의 딸 공주의 아들로서 자라나고 강력한 왕위를 승계할 후계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유모로 자기를 키워준 생모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운명적인 보명을 듣고 자란다. 그의 소명의식은 어느날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애굽 병사를 쳐 죽이는 의협적인 거사(?)를 치름으로 서막을 올리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바로의 눈을 피해 살인자로 전락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는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사람들은 리더의 자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을 비전, 소명의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비전-애굽을 구하는 일- 소명-자기백성을 구하는 일- 철저한 비전과 소명의식이 있었지만 이것이 모세를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지 않는다. 두번째 그는 철저한 영적능력을 갖춘 소위 카리스마가 있었던 지도자였다. 고대의 위대한 제왕이나 강력한 지도자들에게 일상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는 무엇인가 다른 초능력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만남을 통해 바로로부터 이스라엘을 이끄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카리스마가 강력한 초월적인 지도자의 요소를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애굽의 바로보다, 애굽의 술객들과 박사들 보다. 그리고 제사장들보다. 더 강력한 신적 권위를 갖춘 바로와 같은 위치에 올려 놓아도 될 만큼 그는 강력한 지도자 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세를 기록한 성경의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나는 모세가 정말로 위대한 지도자 일수 밖에 없었던 주요한 요인을 발견하게 된다. 세번째로 그는 백성을 생명을 걸고 사랑하고 구하는 중재자, 중보자의 위치에 선 긍휼의 지도자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 그리고 모세는 그 언약의 증표로 하나님이 직접쓰신 계명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산 이었던 시내산에 오른다.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40일간의 긴 시간을 통해 그는 놀라운 하나님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두 돌판에 손수 이스라엘 백성에게 줄 돌판을 기록하신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 산 아래에서는 모세가 없는 틈을 타 요동하는 백성들은 아론에게 요청을 해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는 신상을 만들도록 요청한다. “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출32:1) 그러자 아론은 백성들에게 금을 헌납하도록 하고 금을 녹여 금송아지상을 만들고 이를 이스라엘을 구원한 여호와라고 선포 한다. 철저한 영적인 배교요 하나님 앞에 가증한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교적 행위를 보시고 진노 하신다. 그리고 모세에게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고 모세 너로 더불어 다시 큰 민족을 일으키시겠다고 말씀 하신다. (출32:10) 얼마나 유혹적인 제안인가? 모세로 큰 민족 큰 나라를 만드시겠다니…….! 얼마나 많은 제국의 제왕들이 꿈꾸는 일인가? 자신의 이름으로 세워진 모세의 제국을 하나님이 보증하시고 만드시겠다는데………! 자신에 관하여 얼마나 원망이 많은 백성이었던가….? 순간마다 불평 불만이 가득하고 자신에 대하여 원망으로 가득한 이 백성들을 끝장내고 새로운 민족을 일으키시겠다니……노아의 이야기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아는 모세에게는 정말로 놀라운 축복이요 놀라운 약속이 아닌가….? 그런데 모세는 이 상황에서 놀라운 변론을 하나님과 더불어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출32:11-14 절까지의 모세의 변론은 참으로 겸손한 지도자의 고백이요,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Compassion이 가득한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지도자에게 필요한 참된 덕목이 아닐 까 생각한다. 오늘날 교회의 영적 지도자에게 필요한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 까 생각되어진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자신에게 조차도 그 분이 하셨던 최초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며 여호와의 진노를 잠재우게 하는 놀라운 모세의 기도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변론을 들으시고 자기의 뜻을 돌이키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기도! 수 많은 광야의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백성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아 섬기던 모세는 비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 닫는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는지? 무엇을 위해서 자신을 부르셨는지 말이다. 모세의 위대한 지도력의 비밀은 바로 이곳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영적 지도자들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여겨진다.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 그리고 백성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 설령 그들이 우매 할지라도 말이다. 백성들의 죄를 가슴에 품고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이 백성을 멸하지 말라는 지도자의 참된 긍휼의 마음이 모세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리더가 성숙해야할 참된 모습이라 믿는다.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지도자 모세 ! 그는 실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이다.

2010년 11월 7일 일요일

A man who has different spirit !(민14:24)

1. 신앙은 신비의 경험입니다.





신앙은 정말로 신비의 세계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쉽고 단순하게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많은 신비의 영역이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A Nature of God) 을 이해 할때면 우리의 인간의 이성적 범주에서는 너무나 이해하기 힘든 때가 참으로 많으니 말이다.

민수기를 읽다가 참으로 남감한 장면을 만난다.



이스라엘이 430년동안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는동안 그들의 고통을 신원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행하시는 장면을 본다.

10가지의 재앙을 통해 바로를 무력화 하고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때 온갖 금은보화를 애굽사람들로부터 받게 하시고 심지어는 애굽사람들까지 이스라엘 사람을 따라 출애굽 구원의 여정을 떠나는 놀라운 역사를 행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나안을 그들이 살수 있는 그리고 살아야 할 약속의 땅으로 주시고 가나안땅을 정복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바로의 병거가 이스라엘을 추적할때 그들앞에 놓여진 홍해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가르시고, 광야를 다니는 동안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을 안내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하심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모세에게 명하여 그들이 정복할 땅을 눈앞에 두게 하시고

정탐군을 보내어 그 땅을 정탐할 것을 말씀 하신다.

그래서 모세는 각 12지파를 따라서 정탐꾼을 선발할것을 명하여 가나안에 들어갈 정보부대를 창설한다.

민수기 13장은 이 정탐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장인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신이 주실 약속한 땅을 주시기 전에 이 땅을 정탐하라고 명령 하셨을까?

하나님이 친히 앞서서 그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시면 될 텐데 왜 광야에서도 하지 않았던 전쟁을 자신이 약속한 땅에서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



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신앙의 여정의 계획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이 바로의 꺽으며 애굽을 건너게 하는 데 이스라엘이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때 그들이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셨고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였다.



구원의 비밀인 것이다.

구원을 계획하는 일도, 구원을 이루는 일도 우리는 어떤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여호와께 속한 것이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2:8-9 절은 "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 라고 말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 그 일을 바라보고 받아 들이는 것이다.

구원의 믿음은 받아 들임의 믿음인 것이다.



민13장에 이스라엘의 정탐꾼은 가나안땅에 들어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40일 동안을 그 땅을 경험하게 하신다.

그들의 광야생활의 40년과 가나안땅의 40일은 정말로 전혀 다른 경험인 것이다.

민13:27에 이스라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을 수 있다.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데 ....... "

과연 그 땅은 하나님이 말씀 하신대로 비옥한 땅이었고 모든 과실또한 얼마나 큰지....포도송이 하나를 장정 구 사람이 막개기에 꿰어 메고 다닐 정도 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신실하시고 참되시며 진실하심을 확인 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틀려본적이 있는가?



2.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과의 차이를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그런데 민13:28 ~29 절에 보면 이스라엘 정탐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 로 시작되는 그들의 보고는 그들이 현실을 보는 그들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성읍은 견고하고.....심히 클 뿐 아니라......거기서 전설속에서만 듣던 아낙자손( 네피림의 후손들v33)을 보았고........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v33)



신앙을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과 흡사하지 않은가?

신앙의 갈등은 여기서 부터 출발한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비전과 우리의 현실과의 차이, 갭인 것이다.

어린아이와 거인의 차이가 아니라..... 거인과 메뚜기......

현실에서 경험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능력은 항상 이러한 큰 차이를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맏기신 적은 없으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우리가 한다면 우리는 항상 우리가 성취한 그 일에 매료되어 자신을 높이는 일에 현안이 될 수 있으런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맏기심으로 우리 자신의 신앙을 테스트하시면서 신앙과 현실의 차이 사이에서 우리의 참된 신앙의 태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시련을 경험해 보지 못한 신앙은 신앙일 수 없는 지도 모른다.

바울은 로마에서 더더욱 " 시련이 없는 사람은 사생자요......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시련은 연단을 연단은 인내를 인내는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너희가 시련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뻐하라고 말씀 하신다.

왜냐하면 그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지난 8년동안 가나안땅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사람처럼 이 땅을 정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많은 이들이 뉴질랜드를 다녀가며 이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 같다고 아름다운 땅 축복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ICINZ을 지나가는 많은 이들이 이 곳에 왜 선교사 훈련센터가 있어야 되는지.....그리고 앞으로 선교사들을 쉬게 하고 재충전하는 일을 위해서 얼마나 적합한지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소릴르 듣는다.



그런데.......우리가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약속의 땅일 수 있고 또 그러한 축복의 조건을 가진것을 우리가 다 알고 동의할 수 있지만.....마치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 하는 이스라엘 정탐꾼 처럼.............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이성적 판단과 보고를 듣게 되는 것이다.



나는 늘 이 현실과 비전, 현실과 하나님의 약속이 갶이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경험하여 왔다.

이것이 신앙의 딜렘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이런한 모습이 아닐런지..............?

비행사들의 훈련중 가장 어려운 것이 계기비행을 시작하는 것이란다.

고공의 창공에서 육안으로 비행하는 시계비행은 저속의 항공기 일때 가능한 일지만 수천피트 수만피트의 창공에서 음속의 비행기를 모는 일은 시계비행으로 이미 불가능한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지형표시로 삼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에....그는 자신의 육안으로 도저히 느낄수 없는 숫자의 정보만을 갖고.....그 계기를 의지하여 비행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조종사들은 그 계기비행의 순간이 조종사에게 가장 불안했던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의 경험과 지식과, 정보와 이성적인 합지적인 조건과 대안이 아니라.......마치 현실과는 아루런 관련이 없는 하나님의 비전의 지도만을 갖고 나의 전 인생을 여행한다는 일은 가장 불안한 삶의 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지난 8년을 계기비행을 하는 조종사처럼 우리 가족을 이끌고......이 가나안땅을 정복해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3. 신앙은 불순종과의 싸움입니다.



민13:26~33 에서 정탘꾼들의 보고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는것만 같아 보인다.

현실에의 인식, 자각, 이럴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주 현실의 노예가 되어 불안이라는 감옥에 갖힌 죄수처럼 그 공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미난 일은 불순종은 항상 회한에서 시작됩니다.

차라리 예수 믿지 않았을때는 자유라도 있었는데, 재미라도 있었는데.........

차라리 그 때가 더 나았어........

민14:1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 우리가 애굽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것을............. v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리 애굽으로 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여러분의 지금의 삶의 모습은 어떤가요?

당신은 과거를 회상하며.......차라리 내가 살아왔던 그 때가 더 낫다고 생각하며 회한의 원망에 가득차 있지는 않는지요?

거기다가 조직적인 움직임을 시작하지는 않는지요?

v4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 두종류의 리더십 *



여기에 보니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봅니다.



1)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십



즉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불신앙, 불순종의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부정적인 생각을 마치 절대적인 진리인것처럼 믿으며 그것을 설파하며 무리를 모으는 부정적 영향력의 리더십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은 항상 무리를 짓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쩌면 범죄하는 사람이 항상 단독으로 범행하기 보다는 자기를 동조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행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원수 마귀는 항상 자리를 추종하는 귀신들의 무리와 자리를 따르는 불순종의 아들들 이 풍속을 쫒는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어......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 왕 노릇 하는 마귀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민14:4)



여러분 ! 조심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에 있다면 나는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로 살고 있는지? 조심 스럽게 자신을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당신이 있다면 당신의 영향력은 더 클 것입니다.



2)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십



그런데 하나님은 역사를 이루는 데에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하신 대로 믿고 따르는 믿음의 리더십이 있다는 것입니다.

v6~10

수많은 사람들이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순간에 가나안땅을 정탐했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의 옷을 찢습니다.

극한 슬픔의 표현입니다.

극한 절망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긍정의 힘을 설파 하기 시작합니다.

v7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입니다. "

v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 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시며.......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

V9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지 마십시오.....또 그 백성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먹이입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고......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



아 !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이것은 긍정의 힘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보는 눈을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정의 이유를 찾아낼때 신앙의 사람은 긍정의 이유를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2:10의 표대결에서 신앙의 눈으로 긍정의 믿음을 설파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소수였습니다.

민주주의 원칙대로라면 우리는 다수의 힘을 이길 힘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항상 수많은 부정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힌 다수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논리로 이길 힘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길 힘은 여호와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노로 돌에 맞으려 할때 여호와께서는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 주십니다.

아 !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비밀입니다.

오늘 교회는 세상의 밥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돌을 집어 들고 교회를 치려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우리의 위기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앙의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사단의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부활의 영광이 주님위에 임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칼의 힘이 아니라, 권력의 힘이 아니라.......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여호와의 거룩의 영광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막 가운데 영광으로 거하셨던 주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 ! 하나님 ! 이 곳 ICINZ에 당신의 영광이 거하게 하소서.....

부정의 말들이 사라지고 원망의 말들이 사라지고.......

여호와의 영광을 선포하며 찬미와 감사의 고백들이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 제가 다시 당신앞에 그렇게 서기를 원합니다.

내 입술에서 모든 원망의 말이 사라지게 하시고....영광과 찬미와 감사와 긍정의 말들이 있게 하여 주시고....긍정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



4. 하나님은 그 마음이 다른 자를 찾습니다.



하나님은 진노 하십니다.

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겠다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와 다시 딜(deal)을 하시기를 원하는 모습을 봅니다.

v14:12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



지도자의 딜렘마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을때 네 주님 그렇게 하십시오 ! 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변호하는 변호사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마치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서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금 모세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 당신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만일 애굽 사람들이 가나안의 거민들이 당신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실 능력이 없으셔서 이들을 다 이곳에서 죽이셨다고 하면 당신의 이름의 영광은 어찌 되겠습니까?

하나님 맞습니다.

백성들의 잘 못한것이 맞고 불순종한것이 맞지만............

하지만 당신이 이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고 이들을 축복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이들을 진멸하였다 하면.....

당신의 이름의 평판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14:16~17



이곳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모세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모세가 어떤 리더가 되었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중보자요 중재자요......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백성을 사랑하며 구원하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닮은 리더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참으로 선한목자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기독교 지도자로 사역할때...... 원망과 시비의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럴때마다......

실망과 분노에 가득차서....하나님 저들을 맘대로 하십시오" 라고 손을 놓고 싶을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셨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깊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참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리고 한가지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용서하시지만 당신은 당신의 공의를 실현 하신는 하나님 이신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용서를 받았지만 불평하고 원망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부분이 약속의 땅을 밟아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라웁게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기억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갈렙을 향하여 말하기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민14:24 "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아 !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인가요........?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오 주님 ! 제가 갈렙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내가 밟았던 이 땅에 다시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그리하여 당신의 이름을 높이며......온전히 여호와가 통치하시고 소유하는 ICINZ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이곳에서 당신의 안식의 축복이 실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이곳에서 당신의 샬롬이 이루어 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

이곳에서 부정한 생각과 불순종이 사라지고 순종과 긍정의 믿음을 경험하는 변화의 체험이 있는 여호와의 영광이 임재하는 땅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나의 마음이 다르게 도와 주시옵소서 !

나의 생각이 다르게 도와 주시옵소서 !

나의 행동이 다르게 도와 주시옵소서 !



주여 ! 이곳이 거룩한 당신의 영광이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아멘 !

2010년 10월 13일 수요일

가짜가 진짜를 대신할때......(왕상 12:25-33)

한국인 처럼 진짜에 목말라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진짜에 목숨을 걸었으면 참기름인데 순참기름이라 합니다. 진짜 순 참기름까지 나오는 판입니다. 영적인 가치에 있어서도 진리가 아니라 참진리라고 붙입니다.

요즘은 가짜가 너무 진짜 같아서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가 참 많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혹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영적인 생활과 삶에도 일어나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은 각세대마다 이처럼 영적인 배교와 타락에 대하여 아주 분명한 말씀을 전하여 주십니다.

10계명에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지 말 것을 말씀 하십니다.

우상이란 참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표현에 gods라고 표현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God이 아니라 gods입니다.

어찌하면 하나님과 거의 비슷한 기능과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창세이래로 우리는 영적인 타락이후로 이러한 진리와 진실에 대한 영적분별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아 왔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변질한 사단의 궤교에 하와는 진짜같은 가짜의 영적인 deception즉 속임에 빠져 인류전체에 커다란 재앙을 가져 옵니다.

말세에는 더더욱 이러한 영적인 속임수, 거짓진리,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날 것을 말씀합니다. (마24:14) 이것이 주님의 재림, 즉 말세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각 세대에 나타나는 영적인 배교, 그리고 속임에 대한 분명한 경고를 보여 주는 사건을 우리에게 소개 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로보암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영적생활에 대한 무서운 경고를 들려 주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왕의 실정과 배교로 인하여 그를 경계하고 견책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웠던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실때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존귀히 여기며 주의 법도를 따하 행하면 다윗에게 행했던 것처럼 그를, 그의 나라를 축복하실것을 약속 하십니다. (왕상 11:38)

이 점에 보면 그는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왕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영적인 경험을 따지자면 그는 하나님을 체험한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율법과는 전혀 동떨어진 배교의 길을 걷게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의하여 세워진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그는 그의 통치를 통하여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그러한 나라를 세울 기회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정말로 다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1. 그는 하나님의 왕국이 아닌 자신의 왕국을 건설합니다.

그에게는 놀라운 통치력이 있었음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열지파가 그에게 속한 것을 보면 이는 엄청난 축복이요 이를 통치하는 그는 놀라운 정치력을 가진 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이 놀라운 축복을 사용하여 그의 성읍, 도시들을 건설하면서 왕국을 건설하여 나가지만 이는 하나님의 세우시는 왕국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따라 세워 가는 인간적인 개인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현대교회에 이루어 지는 가장 위험한 타락이 교회 가운데 이루어 지는 마치 교회를 교회 지도자의 또는 교회의 일련의 리더십 그룹이 마치 자기왕국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교회성장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 되어 집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여로보암이 행했던, 영적기만이라고 믿습니다.

마치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여러곳에 도시를 건설하지만 이 도시들은 하나님의 도성이 아니라 여로보암 자신의 도성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v27절에 보니까, 유다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가 제사를 드릴때에 그들이 변하여 유다왕국에 남으며 자신을 배반할까봐 자신의 도성을 건설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중세에 이르러 교회는 일반인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까봐 하나님의 말씀을 사제들에게만 허용하고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모든 권한을 사제, 교황권에 한하여 제한 하였던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리고 그들은 엄청난 영적 권한을 그리고 나중에는 정치력 권한까지 소유하였던 것을 보게 되어 집니다. 중세의 카톨릭은 마치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참된 장소에서 참된 예배를 두려워 하여 대체제사를 만들었던 것과 같은 영적 기만을 행하였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알게 되어 집니다.



2. 여로보암은 영적인 기만을 통하여 거짓 예배, 거짓 영성을 만듭니다.

v28에 보니까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가 예배할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계획하여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 이스라엘아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 갈것이 없도다,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말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영적인 기만에 속아 넘어 갑니다.

이들에게는 참된 예배와 제사가 아닌, 진정한 예배와 제사를 대체한 유사제사와 유사 예배를 드리는 오늘날 교회에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남을 봅니다.

수많은 가르침들이,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만족시키며 그들을 위한 그들의 종교를 만드는 정교중독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가르치고 예배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육신과 그들에게 의미와 만족을 줄 수 있는 유사기독교적 가르침을 통하여 깊은 영적기만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는가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면 당신은 깊은 영적기만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 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위해 존재하는 여러분의 우상을 구하고 있는것은 아닌지요?



3. 여로보암은 거짓 영성을 통해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v 29-32 절 말씀에 보니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그들의 산당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산당을 섬길 제사장을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호와의 절기가 아닌 유사한 그들만의 절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이 시대에 일어난 것처럼 건물에 관심을 갖습니다.

산당을 짓는 것처럼, 그들은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와 건물에 더 깊은 관심을 두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비극입니다.

또 하나의 무서운 것은 순결치 못한 제사장 제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레위 지파에서 삼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레위지파가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는 엄청난 불순종을 자행 합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영적제도와 그리고 교권주의등 그들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과 기름부으심과 상관이 없는 보통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는 일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수많은 신학생들이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배출 됩니다.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부르신 영적 소명에 분명한 간증과 증거가 있는 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제자 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제자중 지원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적 사역에는 지원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고 뽑으신 자를 통하여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만입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여 나아갈때 하나님의 분명하신 부르심과 뜻을 분별하는 분명한 간증과 확증이 있어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절기를 지키게 합니다.

이것은 진리를 희석시키고 인간적인 제도나 규례를 통하여 여호와의 명하신 절기와 상관없는 자기들의 절기를 만들어 지키는 엄청난 불순종을 범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4. 영적 기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뜻을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정한...........33절의 말씀에 보니 자기 마음대로" 라고 말씀 하십니다.

주님의 로드십이 없습니다. 주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주님을 섬기되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데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워스트한 영적 기만인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진정한 영성은 그리스도의 주권아래 무릎을 꿇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십니까? 아니면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뜻을 따라 주님을 순종하십니까?

2010년 10월 11일 월요일

꿈을 꾸기를 원한다면........

잠들기 전에,



정신의학자들은 자신이 꾸고 싶은 꿈을 꾸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잠들기전에 그 날 있었던 일을 적어 두는 등 문제나 걱정거리를 세밀하게 생각해 놓는다.

그런 뒤 꿈에 이런 문제들에 대해 응답이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세피드 코미나스의 [ 치유의 글쓰기] 중에서...



성경의 이야기중에 야곱의 꿈(창 28:10-22)은 매우 진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장자의 축복권을 교활한 방법으로 그의 형 에서로 부터 빼았는다. 그리고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그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난을 가기 위하여 긴 여행을 떠난다.

얼마나 긴 여행이었을까?

얼마나 외로운 여행이었을까? 얼마나 처량한 여행이었을까?

그야 말로 그는 외로운 방랑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의 인생이 그런 모습이 않을까? 우리가 최상 이라고 붙잡았던 것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안식과 쉼을 가져다 주지 못함이 야곱의 야망에 찬 장자권이 그것과 비할바 못되는 것 같다.



1. 꿈은 인생의 가장 외로운 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에게 꿈이 필요한 때는 인생의 정점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종종 우리가 꿈을 꿀때는 성경의 야곱과 같이 인생의 가장 외로운 순간에, 인생의 바닥에 있을때

필요한 것이다. 가장 외로운 순간에, 가장 험난한 인생의 순간에 우리는 꿈을 갖게 되고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는 여행중의 한 들판에서 한 돌을 베고 잠을 자다. 꿈을 꾸게 되었던 것이다. (v11-15)

와, 돌을 베고 잠을 청할 정도로 그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정말로 인생의 가장 bottom line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하늘과 연결되어지는 꿈을 꾸게 된다.



2. 세상의 꿈이 하니라 하늘의 꿈을 꾸어라 !

성경은 야곱이 하늘문과 연결되는, 즉 주의 천산들이 하늘을 오르 내리는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꿈이 이 땅에만 존재하는 그리고 이 땅에만 속한 것이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그리고 이땅에 속하여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꾸는 그 꿈이 영원한 가치를 지닌 천상의 것, 하늘의 것, 하나님 나라에 속한 꿈이기를 바라신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나의 꿈이 과연 하나님 나라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 꿈이 이루어 질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 되어질 수 있는, 그리고 영원히 존속하는 영원한 가치를 가진 그런 꿈을 나는 갖고 살아 가는 것일까?

만일 이 땅에만 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꿈이 아니라 그것은 한 낱 욕심에 불과한 것이다.



3. 꿈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아라 !

야곱은 꿈에서 하나님을 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야곱은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하나님의 꿈을 본 것이다.

내가 하늘의 문을 열고 하늘의 음성을 들을 때 그 꿈은 단순히 나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으로 바뀌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를 축복하신다고 말씀 하신다.

수많은 자손이 그를 통하여 나올 것이라고 말씀 하신다.

왜 하나님은 에서에게 그 꿈을 말씀 하시지 않고 교화하기까지 한 야곱에게 그분의 꿈을 말씀 하시는 것일까?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야곱은 하늘 나라에 대한 가치를 보았던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을 걸고라도 그는 하나님의 축복,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동일한 약속의 축복을 갈망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하늘 나라를 사모하는 강렬한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이 열망이야말로 하나님이 찾는 예배자의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전심으로 찾는 자를 찾으신다" 말씀 하신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 하지 않으셨던가 ?

예수님은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자기를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 하신다.

야곱 ! 그는 비록 형을 속이는 것 같으나...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자 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야곱을 하나님은 이쁘게 보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하늘 나라의 계획을 말씀 하셨던 것이다.



4. 우리가 하나님의 꿈을 꿀때 하나님의 임재는 떠나지 아니 하신다.



15절에 보니 하나님이 약속하여 주시기를 "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 하신지라..."

아 하나님이 그 꿈이 이루어 지기까지 떠나지 아니 하시겠다니.....

이 말은 내가 하나님 안에서 그 꿈을 이루기 까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내가 하나님 나라의 꿈을 꿀때 내 사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은 결단코 나를 버리시지, 떠나시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아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요 은혜인 것이다.



5. 하나님의 꿈은 삶의 환경을 바꾸어 놓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을 통하여 그의 인생의 변화를 경험 하는가?

아브라함 링컨과 같이, 월트 디즈니와 같이, 꿈을 가진 사람은 그의 인생이 변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성경은 야곱이 자기가 잠자고 꿈꾸었던 곳을 벧엘 이라고 지었다.

벧엘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곳이 원래 루스라는 지역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 안에서 꿈을 꿀때, 그 꿈을 꾸는 사람을 통하여 그곳은 거룩한 하나님의 땅이 되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장소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은 신약에 와서는 그곳은 교회를 말씀 하신다.

왜냐하면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 들중에 함께 있느니라고 말씀 하시지 않으셨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인가? 당신은 하나님의 꿈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오늘 당신이 꿈을 꾸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과 상세한 내역을 거래 하기를 원한다.

마치 야곱이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서원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당신의 꿈을 나누어라.

그럴때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꿈을 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