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22일 수요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 (사43:1-7)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일까?

사람들이 가슴 속에서 터져 오르는 강한 열망으로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일까?

사람마다 사는 시대가 다르고 또 사는 모양이 다르지만 동.서를 떠나 인간의 심성속에 뿌리박혀 있는 본능 같은 열망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 당신을 사랑합니다. ! " 당신은 나에게 소중한 존재 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 믿는다.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이 태어나서 인성이 형성되는 시기를 0~3세 때의 시기를 가장 중요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나의 인성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라는 사실이다.

양육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사람은 "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 인가? " 하는 정보를 입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라나서 5세이전에 일어난 경험들을 기억하기에 힘이 든다. 하지만 그 무수한 경험과 기억들은 나의 무의식의 창고에 저장이 되어 나를 바라보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 누군가에 의해서 소중한 존재로 인식되고 사랑을 받은 아이는 건강한 자존감을 통하여 충분히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그리고 지식적인 정보를 접하면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날 성경을 보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구절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이러한 존재와 가치관을 형성하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치유와 자아상을 형성하는 과정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갖고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이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이사야 43:1-7절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는 메세지를 들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한다.



1.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의 근원임을 말씀 하신다.



v1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야곱" 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인용하신다.

여기에서 야곱은 야곱 개인이기 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읕 통칭하는 대명사로서 쓰여지고 있음을 본다.

즉 하나님이 야곱이라고 부르시는 이 부르심 속에는 바로 나와 너 우리 모두가 포함되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우리 개개인 한 사람을 기억하시고 그의 마음속에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다니.......

그리고 그분이 나의 이름을 기억하시다니......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치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고아처럼 지내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부모님이 친척에게 아이를 맞겨놓고 먼 여행을 떠났다. 타고가던 배가 풍랑을 맞아 좌초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아이를 맡은 친척은 이 아이를 고아처럼 그리고 마치 그 집안의 하녀처럼 대하며 부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고생을 하던 이 아이에게 어느날 아주 멋진 신사부부가 찾아온다.

그리고 이 소녀를 안으며 고백 하기를 " 내가 낳은 엄마, 그리고 아빠"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풍랑에 좌초 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았던 아이의 부모는 수년동안을 한번도 자기의 딸을 잊어 버린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아이를 찾아 자신이 아이의 부모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아이는 드디어 행복한 삶을 산다는 동화의 이야기다.

나는 마치 오늘 이사야 말씀을 통하여 전하시는 이 말씀이야 말로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지위를 잃어 버리고 죄의 노예로 살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구원의 메세지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 내가 너를 낳았다" 라고 말씀 하시는 하나님 !

성령으로 우리가 그 분안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 이십니다. (God is our protector)

V2-3절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분이 우리의 구원하 그리고 보호자 이심을 선포 하십니다.

"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이 말씀은 무슨 말씀 인가요? 이 말씀은 우리아 어떤한 상황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분이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약속의 말씀 인 것입니다.

마치 시23편의 말씀을 연상 시키는 것처럼.......심지어는 우리가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 찌라도 그분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의 근원을 확인 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뿌리를 확인 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고 우리의 근본을 확인시킴으로써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기에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접한다 할지라도 그분이 우리의 친히 구원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은 어떤 일을 행함에 두려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내가 처한 일 때문에 두려움 가운데 있지는 않나요?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위기 가운데 있을때 그 분이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 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께 존귀한 자입니다. ( We are precious being before Him)



v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세어 가장 아름다운 고백을 하여 주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에게 이런 고백을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친구에게, 배우자에게 이러한 고백을 들어 보신적이 있나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기를 내가 그 분 시선에, 그 분 앞에 참으로 존귀한 자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 분앞에 보배로운 존재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아 ! 험난한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나의 무기력함과 연약함으로 인하여 나의 존재감, 그리고 나의 가치들을 잃어 버린채 사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놀라운 사랑의 고백을 하시는 것입니다.



" 너는 내게 보배로운 존재야 ......!

너는 내게 존귀한 자야.....! 왜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 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존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 인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존귀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하심의 약속은 항상 그 분의 동행 하심으로 나타 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동안이나 동행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수십년간을 동행 합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과 40년을 동행 합니다.

노아는 1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 합니다.

성경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분모가 있다면 그 들 모두는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할때 우리의 삶은 안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 할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 할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목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 할때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 것을 말씀 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말씀 하십니다.

마치 여호수아를 격려하며 말씀 하셨던 것처럼.......하나님은 나의 인생과 함께 하실것을 말씀 하시면서 우리에게 두려워 말것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부터 저는 여호와의 구원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역사를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축복을 구하지 않으렵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의 동행함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임재를 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임재와 동행하심은 내가 구하는 어떤 것보다 우선하며 위대하며, 그리고 가장 절실한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으로 부터 이러한 동행하심의 약속을 들으셨습니까?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약속, 아름다운 소리, 아름다운 언약 !

저는 바로 오늘 이사야 43:1-7절을 통해서 주신 말씀 이라 믿습니다.



저는 오늘 주님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오 하나님 ! 저로 당신과 동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

2010년 9월 9일 목요일

당신의 안전 지대를 떠나라 !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



아브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 지금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라는 음성을 듣는다.



노년의 나이에 자신이 정착했단 곳을 떠난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인간이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심리적인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분리의 두려움이라고 한다.

아기들은 가장 본성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들을 살펴보면 아이들이 제일 두려워 하는 순간이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이다. 엄마의 얼굴이 보이지 않은 것이 자신이 엄마로 분리 되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분리가 가져다 주는 두려움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장 재미 있어 하는 놀이가 소위 "까꿍" 놀이이다. 엄마나, 누나가 눈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서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아이의 긴장됬던 마음이 녹아 내리고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띄는 아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를 얼마나 미소짓게 하는 일인지 모른다.

사랑하는 존재가 눈 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아가의 표정이 긴장감에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 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 다음 아이가 자라나서 좋아하는 놀이가 술레잡기라는 놀이다. " Seek and Hide " 라 불리우는 이 놀이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다 존재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아이들은 구석진 곳을 좋아한다. 장농속이든, 책상 밑이든, 그리고 남자 아이들은 나무밑에 나무 가지들을 꺽어서 만들어 놓은 자신들만의 비밀스런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무의식 가운데 모태 가운데 있었던 그 환경을 만들어 놓으며 안전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이가 태줄을 끊고 세상에 나오는 것은 실로 하나의 충격이다.

마치 우주선이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 날 때 엄청난 충격을 경험하는 것처럼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충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최초의 분리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분리를 두려워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신이 자라나고 태어났던 고향을 찾는 귀소 본능이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이 에덴에서의 범죄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 가운데 하나인 죽음의 형벌을 예견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죽음" 이란 바로 분이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지는 두려움, 자신으로부터의 분리인 것이다.

그러기에 분리란 고통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인간의 업보 가운데 하나를 헤어짐" 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정착하여 살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 하신다.

왜 일까?

하나님은 왜 이 노년의 남자인 아브라함에게 떠나라는 명령을 하신 것일까?

그가 젊은 청년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왜 가여운 이 노년의 남자인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광대한 뜻을 이해할 길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이해하고 따를 하나님의 친구를 찾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창세기 첫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 하시고 주신 명령 가운데 하나가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 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땅에 충만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지속적으로 흩어지고 이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창 11:4 절에 보니까 "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라며 하나님의 계획에 반기를 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끝임없이 안전을 추구한다. 설령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대치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안전지대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성을 쌓음으로써 자신들을 보호하는 그들의 안전지대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산성이고 보호이시기를 원하시는데도 말이다.



몽골의 위대한 정복자 징기스칸은 그의 아들들에게 " 성을 수축하면 망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

역사에 보면 터키족의 조상이었던 돌궐족의 장수였던 돈유쿠크는 그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새겼다고 한다.

" 길을 뚫는 자는 번영하고 성을 쌓는자는 망한다. "

아 얼마나 놀라운 통찰력인가..............? 유목민이었던 몽고족이 성을 쌓아 정착함으로 유목민족의 기질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한 징기스칸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정복자들이 성을 쌓다가 망하였는가............

인공위성에서 조차 쉽게 분별해 낼 수 있었던 만리장성을 쌓던 중국의 왕조는 성을 쌓으며 망하여 갔던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고향을 떠나라고 하신다. 그의 가족을 떠나라고 하신다.

그리고 어디 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 하신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두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가야할 목적지도 분명하지 않은 여행을 떠나는 그것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여행이 아니라 돌아옴이 약속되지 않은 여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구하시는 구원의 방편 이었음을 생각해 본다.

그가 살고 있었던 갈대아 우르는 그 당시에 물류가 교통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월신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땅이었음을 창11장 후반부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물질주의의 노예로 살아 갈 수 있었고, 여호와 하나님과 상관없는 다원주의적 사고에 길들여저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아야 했을 지도 모른다.



1. 떠남은 우리에게 가야할 목적지가 필요로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가 있어야 함을 알려준다.

우리는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장소를 떠나 볼때,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가치와 목적이 필요로 함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집을 떠 날때 목적지 없이 떠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있는 것을 버리라 하실때면 다른 것이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며, 우리로 하여금 있는 곳을 떠나라 하시면 가야할 곳이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 떠나라" 는 음성을 들을 때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실 곳을 향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2. 떠나라 하시면 그것은 동행 하시겠다는 뜻이다.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말씀 하셨다. 그리고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고 말씀 하신다.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님이 보여준 땅이 아니라 보여줄 땅이라 말씀 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은 주님이 우리가 당도해야 할 그 땅에 도착하게 되기까지 주님이 함께 동행 하시겠다는 것이다.

왜 나는 한번도 그 생각을 미처 해 보지 못했을까........?

왜 나는 그것을 두려움이라고만 생각하고, 어쩌면 하나님이 참 심술 굿은 아버지의 모습만을 떠 올린 것일까? 왜 나는 그것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총이고 사랑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두려움으로 떠나지만 아브라함이 그 긴 여행동안 하나님 아버지와의 긴밀하고도 친밀한 대화와 교제가 그리고 그 분의 공급하심이 함께 따랐음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그 길이 얼마나 달콤한 하나님과의 밀월의 시간이었음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브라함을 떠나라고 하실때는 그 말은 하나님이 그와 동행 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을 .......

이 생각에 미치자 나는 마태복음 28:18-20 절까지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을 남기실때

주님도 가라고 말씀 하시며........후반절에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시니 말이다.

떠나라고 하시는 말씀은 동행하시겠다는 그 분의 약속이 있음을 생각해 보자.



3. 우리는 떠 날때 비로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어떤 맘으로 자기의 집을 떠났는지 그의 속을 알수 없지만.....그가 갈대랄 우르를 떠나 하나님가의 동행에 나섰을 때 아르라함은 그가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축복을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대근동의 역사에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는 거부가 되었고 주변 민족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가 떠나는 것을 거부하였다면 그는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그가 누렸던 수많은 축복, 그리고 그가 평생에 갖지 못했던 자신의 후사를 잇는 이삭을 얻는 놀라운 기적을 그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1989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 떠남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나는 크고 작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주님의 역사와 일들을 볼 수 있었다. 전쟁중인 이락의 최 전선에 서보기도 했고, 선교의 중심이었던 영국의 런던의 한 복판에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경험해 보기도 하였다.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경험할 수 없고 누릴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을 ......



어느날 베드로와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갈리리 바다를 여행 한다. 밤이 되자 날씨는 급변하여 바다에 놀라운 폭풍이 몰아친다. 그 때 바다위로 예수님이 걸어 오신다. 모두들 유령인줄 알고 두려움 가운데 있을때 베드로는 주님께 말한다. 주님 당신이거든 저를 명하여 물위를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

참으로 황당한 요구이다.

그런데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위를 걸으라 명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것은 보트를 떠나는 것이다. 보트를 걸어나오지 않고서는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 기적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떠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놀라운 역사를 경함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믿음으로 비전을 품고 보트를 떠나 나올 때 우리는 비로서 물 위를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의 비밀인 것이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앞으로 20년 후에 당신은 저지른 일보다는 저지르지 않은 일에 더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밧줄을 풀고 안전한 항구를 벗어나 항해를 떠나라.
돛에 무역풍을 가득 담고 탐험하고, 꿈꾸며, 발견하라.” 고 했다.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나이 74세에 유명한 철학 책인 『순수이성비판』과『실천이상비판』을 썼다.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는 85세에 명곡 “아베마리아”를 작곡했다. 시인 테니슨은 80세가 되어 “죽음을 향해”라는 시를 세상에 내놓았고. 괴테는 80세에 역작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안에 더 새로워지고 온전해지기 원하는 꿈이 있느냐이다.



그렇다.

우리가 우리 가슴에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이루기를 꿈꾸는 꿈이 있다면, 두려움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전지대를 과감히 떠나야 한다.

그럴때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경험하며,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크고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주의 음성을 들으며 당신의 안전 지대를 떠 날 준비가 되었는가 ?

2010년 9월 8일 수요일

당신의 인생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 !!!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 창 12:1



우리는 인생의 많은 것을 아르라함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든지 부르실 수 있다는 점이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거부했다거나 아니면 양해를 구하며 연기를 했다거나, 아니면 부르심을 피하여 요나처럼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없다.



아마도 그의 대답은 " 예 하나님, Yes, Lord, I will go ! 제가 가겠습니다" 라고 했을 것이다.

창12장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는 장면을 서술 했을 때,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렀다" 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성경이 아브라함의 그 이전의 삶을 상세히 서울하지는 않아도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는 분명히 그를 부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미 창 11장을 통해서 우리는 바벨탑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의 말씀을 보면, 어쩌면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그 시대, 또는 그가 살던 그곳은 수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던 다신주의가 창궐하던 그러한 때 였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길이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상숭배와 다신주의가 창궐한 그 때에도 아브람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참된 주인되신 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분명한 사람이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전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하던 방법으로 못하던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 인생의 전환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늘 상 신기롭고 경이로운 것은, 내가 하나님을 찾았던 시간보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운명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친히 그가 우리를 찾아 오신다는 사실이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지 않고 순종한 절대적 순종의 태도가 우리를 책망한다.

그는 자기가 너무 늙었다고 젊은 사람을 가리키며 자신이 적당한 사람이 아니라고도 변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미 충분히 늙었기 때문에 이제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너무나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는 정착하고 노후를 안정되게 누려야 한다고도 항변하지 않는다.



창 12:4 절에 보니,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다" 고 말한다.

하나님의 왕국에는 " 은퇴" 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요즘처럼 조기 은퇴를 강조하고 사실은 수 많은 사람들이 옛날이면 한참 일할 나이의 때 은퇴를 해야 하는 요즘의 시대적 상황에서 보면, 아브람의 삶은 그야 말로 역발상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한가지 아브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때는 항상 그 분은 자신의 목적을 갖고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이다.

그 분의 부르심의 목적은 항상 우리가 갖고 있었던 우리 인생의 성취 목표보다 항상 더 크고, 그리고 더 절대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순종의 댓가는 항상 " Good Surprise " 이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더 크고 기이한 계획을 청사진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하고 항상 크시다.

창 11장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름을 창대케 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마음의 숨은 뜻을 보시고 언어를 혼잡케 함으로 그들의 이름은 어느 누구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아브람은 하나님의 계획처럼 "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v2..

그의 이름은 중동근바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아니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이름은 너무나 유명한 이름이니 말이다.

참으로 아니러니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천국은 " 높아지고자 하는 자를 낮추시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를 높이시는 " 역발상을 갖고 계신것 같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리를 강망하지 않는다.

높은 자리를 갈망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아브람의 삶의 본은 우리를 책망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하시는 역발상적 일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우리는 또 한가지 아브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보호하거나 지키려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그 분이 친히 그를 지키신다는 점이다. (..창 12:3)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높이거나 또 우리를 보호할 아무런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깃발이 되시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10월부터 진행되는 Silver missionary Training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아브람을 묵상해 본다.

70이 가까운 나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선교의 한 현장에서 그 분을 섬기겠다고 고국을 떠나는 이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아브람을 통해서 목소리를 듣는다.



아 ! 우리의 인생에는 너무 늦은 때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거나 삶의 목표가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이야 말로 그 일을 위해 시작할 가장 좋은 때 일 것이다.

아브람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는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늦은 때는 없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가 ?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새로운 생의 비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비전을 가슴에 품게 될 때 사람들은 변화를 시도하게 하고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곳을 향한 미래를 향한 강한 열망이 현재에서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한 강한 열망을 불태우게 하기 때문이다.

몇년전 스튜어트 에이버리 골드가 지은 핑" 이라는 책을 기억한다.

책의 주인공 개구리 핑은 험한 철썩강을 건너 그토록 갈망했던 황제의 연못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곳의 통치자 두꺼비와 연못 주민들은 자신들의 작은 연못이 세상에서 가장 넓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핑은 연못 주민들에게 더 큰 세상이 있다고, 함께 위대한 바다를 만나러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핑의 제안에 오직 젊은 개구리 두 마리, 다이콘과 호도만이 따라나서고 핑은 부엉이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멘토가 되어 광대한 바다로의 모험을 다시 시작한다.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단념할 줄도 아는 것이 성숙하며 어른스러운 것이며 그것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는 이들에게 핑은 이야기한다. "가능성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유일한 진짜 장애물은 항상 자기 자신입니다. " "인생에 있어 무언가 되기 위해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우리 삶의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노년의 나이에 불쑥 찾아온 하나님의 방문을 아브람은 아무 두려움 없이 받아 들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당신은 당신 가슴안에 무엇인가 되기를 갈망하는 강렬한 열망이 있는가? 부지중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방문을, 그 분의 음성을 듣기를 갈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무엇인가를 시작하기에 너누나 늦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2010년 9월 5일 일요일

요나단의 언약! (Covenant between Jonathan and David)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 가운데 신뢰를 찾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고 한탄을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도 사랑과 존경이라는 신뢰가 있을 때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관계에서는 정조를 지키는 것으로서 표현되어 질 수 있는 신뢰가 있습니다.

친구 사이에서도 서로의 신의를 지키는 흔히들 " 의리" 라고 불리우는 신뢰를 표혀해 주는 단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같이 신뢰를 찾아 보기 힘든 시류 속에서 목숨을 걸고 서로의 신의를 지키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우리를 감동 시키게 되어지고 그 감동의 이야기가 살아 있을때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소망이 있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타나는 많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을 말하여 주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그 장면들 가운데 늘 저의 마음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약관의 소년들이었던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 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한 사랑의 이야기 이고 그리고 우정의 이야기 입니다.



첫번째로,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는 흔히 말하는 신분을 초월한 우정의 이야기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천한 목동이었습니다. 다윗의 가족은 양을 치면서 사는 평범한 목자의 집안 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중에서도 가장 어린 막내였고 아버지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을 만큼 그는 아주 평범한 소년 이었습니다.

반면에 요나단은 왕자의 신분 이었습니다. 그것도 살아 있는 권력을 가진 사울왕의 왕권을 이어 받을 적통 왕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이스라엘의 왕위를 물려 받을 약속되어진 미래의 권력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소년의 사랑과 우정은 여인의 사랑보다 승한 깨어지지 않는 우정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두번째로,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는 시간을 초월하여 지속되는 영속적인 우정이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사울왕이 죽고, 요나단도 죽음을 맞이 합니다. 고대 근동의 풍속 대로 라면 언약은 언약을 맺은 상대편의 한 사람이 죽을때까지 존 속 됩니다. 언약의 대상의 어느 한 쪽이 죽게 되어 질때, 그 언약으로부터의 의무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가 왕이 되었을 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그를 보호하고 그글 자신의 왕자의 하나처럼 대하며 자신이 요나단에게 맺은 그 언약을 지켜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우정의 사랑은 시공을 초월한 영속적인 사랑이고 우정임을 보여 줍니다.



세번째로,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언약을 구속적인 관점에서 보여주는 아주 생생한 예표로서의 교훈을 우리에게 전달 해 줍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도들과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승화시키고 영화롭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하기는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들을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 하고 축복합니다.



본문은 사무엘상 18:1-5 로 돌아 갑니다.



"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 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읏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 하였더라,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우리는 왜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저는 요나단이 단순히 어린 다윗이 블레셋의 군대장이었던 골리앗을 죽였던 영웅적인 전투의 소식을 듣고 그의 탁월한 능력때문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은 다윗 못지 않은 놀라운 전투의 승리를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요나단과 병기든 두 소년이 불레셋 군대를 물리치는 사건을 통해서 이미 요나단은 다윗 못지 않은 용기와 담력과 그리고 리더십을 지니고 있었던 탁월한 사람이었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골리앗과의 싸움은 많이 이야기 하지만 요나단과 병기든 소년이 어떻게 블레셋 군대를 물리쳤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의아할 정도입니다.

사실 요나단의 불세출의 영웅적인 승리의 사건은 다윗의 등장 이전에 이루어졌던 것을 통해서 요나단은 다윗처럼 출중한 영웅이었음을 충분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4: 1-23).

아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 입니까? 하나님은 어른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소년들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을 봅니다.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루어야 하는 고대 전쟁사에서 요나단과 다윗이라는 소년을 등극 시키시는 것입니다.



1. 요나단과 다윗은 한 마음으로 연합합니다.



저의 추측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18장 1절에 있는 한 단어를 통해서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의 단서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1절에 보니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Jonathan became one in Spirit with David ..."

이 두 소년이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그 마음은 무엇일까요?

저는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마음 이었던 것이라고 믿습니다.

14장으로 돌아가십시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군대가 불레셋 사람과의 전투에서 불리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나단의 마음을 불붙게 하는 동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장면이 6절을 통해서 나타 납니다.

" 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노라..."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제 눈에서 흐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죽음의 공포앞에 떨며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고 있을 때, 어린 소년이었던 그리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요나단의 병기든자 두 소년의 마음이 의기 투합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위대한 믿음의 결단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전능한 하나님 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요나단의 고백은 무엇인가 닮은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요나단의 고백은 마치 쌍둥이가 같은 고백을 하는 것처럼 다윗이 골리앗을 싸울때의 다윗의 고백과 동일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었을뿐만 아니라 어쩌면 어린 요나단이 어떻게 병기든 소년과 함께 블레셋 군대를 쳐서 승리하였는지를 들었을 것이고 요나단의 무용담은 아마도 어린 다윗에게 믿음의 상승 작용을 하였으리라 저는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45-47절의 고백은 어쩌면 요나단이 불레셋 군대와 싸울때 고백하였던 요나단 고백의 다윗버전(David's Versio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절에서 그들이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그 근거는 그 소년들이 유일한 마음의 고민과 관심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일일까요?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 그 마음이 하나가 되어 여호와 앞에 한 마음으로 나아올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 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하리라 저는 믿습니다.



2. 요나단은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습니다.



3.절에 그들은 한 마음으로 연합하였을 뿐 아니라 마치 여인이 사랑에 빠진것처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은 마치 남자가 여인을 사랑하는 그 동일한 단어, 헤세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신약적 의미로는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사용하신 아가파오" 즉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둘은 언약을 맺는다고 말 합니다.

여기에서 언약이라는 단어는 "베리트" 라는 단어 입니다. 그 때 당시 고대 근동의 언약의식은 짐승을 잡아 그 짐승을 칼로 반으로 가릅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는두 당사자가 갈라진 짐승 사이로 걷습니다.

그 이야기는 만약에 언약을 어길시는 그 짐승과 같이 하나님께서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하게 된다라는 것을 동의 하는 것입니다.

베리트" 라는 단어 자체가 Cut it off" 가르다 잘라내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은 이러한 언약의식을 거행 했으리라 믿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은 18장 뿐만 아니라 20장에 다시 한번 등장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상 20:16-17 절에 그 소년은 다시 들판으로 나아가 두 사람 사이에 서로를 향한 사랑의 언약을 맺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워 이들은 생명을 걸고 서로를 지키고 축복하는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살아 있는 동안 다뒷을 생명을 위협하는 어떤 이들도 요나단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살아 있는 동안 요나단을 위협하는 어떤 이들도 이제 부터는 다윗의 원수가 되는 것 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과 요나단의 가문 사이에 이들은 서로를 보호하고 축복하는 관계가 가문에 까지 이어지는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 때 맺는 언약이 두 가문 가운데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역사를 통해서 바라보게 될 때 전율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무엘하 9장에서 다윗이 요나단 사후 본인이 왕이 되었을 때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요나단 가문 가운데 남은 자를 찾는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삼하 9:1 절에 보니 "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므비보셋을 찾아 그를 예루살렘 다윗의 왕궁에 머물게 하고 그를 왕자의 하나처럼 다윗의 식탁에 함께 하게 하는 놀라운 이야기는 다윗이 어떻게 요나단과의 맺은 언약을 지키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실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을 맺을때는 다윗이 요나단을 위하야 해 줄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요나단은 이 언약을 지키려 할때 그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했습니다.

첫번째로 그는 자신의 왕위를 포기하는 위험을 감수 합니다. 아버지 사울이 아들 요나단을 " 천한 계집의 아들" 이라고 비하하면서까지 다윗을 보호하는 아들 요나단의 행위를 비하하는 모습은 다윗의 존재가 얼마나 사울에게, 그리고 그 아들 요나단에게 위협적인 존재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다윗을 아버지에게로 부터 보호합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창을 던져 죽일려고 했을 정도로 다윗은 사울의 가문에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아들을 죽이려 까지 하면서 자신의 가문을 지키려 했던 사울에게는 아들 요나단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인자하심 때문 이었습니다.

긍휼, 여호와의 사랑, 희생의 사랑, 이것은 아가페의 사랑, 즉 구약의 헤세드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하 9:1 절에서도 다윗은 여호와의 인자를 이야기 합니다. "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에게 여호와의 은총을 베풀리라 " 여기서 은총도 동일한 여호와의 인자, 헤세드의 사랑인 것입니다.



아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입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부르실때 하나님은 여호와의 인자 헤세드의 사랑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비밀을 정확히 바라 보았습니다. " 에베소서 2:8 절에서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여기서 은혜는 여호와의 인자를 말씀 하십니다.

다위과 요나단이 서로를 향하여 가졌던 헤세드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다윗의 사후 솔로몬 시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던 초기에는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으로 통치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은총을 베풀어 지혜와 명예와 부귀를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후에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방여인들과의 통혼에 대한 규례를 어기고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후궁으로 그리고 첩으로 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둘로 나누십니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으십시다.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오직 유다 지파와 그리고 그를 배반하지 않고 남은 베냐민 지파만이 유다에 속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로보암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10지파가 함께 한 이스라엘 왕국을 건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르호보암은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이 남아 유다 왕국을 지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왕상 12:21-23).

참으로 놀라운 것은 사울, 즉 요나단이 속하였던 베냐민 지파는 다윗의 왕국인 유다 왕국에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맺은 언약이 다음 세대를 통해서 이어지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보면서 얼마나 전율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아 ! 다윗과 요나단이 함께 맺은 언약이 세대를 지나면서까지 여전히 하나님의 헤세드 안에서 굳게 맺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신약의 말씀을 읽으면서 다윗과 요나단이 맺은 언약이 여전히 유효 하게 성취되었는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를 소개할 때 그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씀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교회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되었을 때 수많은 이스라엘 지파들이 예수님의 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 들중에는 초기에 교회를 열렬히 핍박하던 한 청년이 있었던 것을 발견합니다.

그가 얼마나 교회에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는 이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한 뒤에도 아무도 그를 교회 가운데로 받아 들이려 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굳이 이 청년 사울을 택하시고 그를 부르셨을 까요.....?

저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빌립보서 3:5 절에서 자신의 가문을 소개하고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한번 전율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어지기까지 하며 수많은 고난과 박해와 죽음의 위협을 무릎쓰고 예수그리스도의 강력한 변증자가 된 사도 바울이 바로 요나단의 후손인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아 ! 이것이 헤세드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요나단이 다윗에게 여호와의 헤세드를 통하여 사랑을 베풀고, 다윗이 헤세드의 사랑으로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고, 모든 이스라엘의 10지파가 다윗의 왕국을 배반하였을때 베냐민 지파만이 남아 다윗의 왕국을 지키었던 것처럼,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헤세드의 사랑으로 베냐민지파, 즉 요나단의 후손인 사울을 전적으로 환상 가운데 불러서 그를 자신을 이방의 왕들과 권세자들에게 선포하고 변호하는 자로 삼으시고 요나단의 후손인 바울은 죽음같은 사랑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추종자,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총의 역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요나단이 언약을 맺을 때 본인에게는 한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인자를 베풀어 언약을 맺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다윗과 요나단과 맺었던 이 언약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백성인 우리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의 완성을 이루는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3,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와 맺은 언약을 보여 주는 놀라운 상징입니다.



성경에 언약(베리트, Covenant)이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맺은 장면입니다.

창 15:1-21 특별히 18 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을 때의 의식을 통하여 우리는 언약의 원형을 보게 됩니다.

즉 짐승을 쪼개어 놓을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불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갑니다.(17절)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그 쪼갠 사이를 지나갔지, 아브람은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람의 생애,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아들 ,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에 이르기까지 언약을 어기는 것은 늘 아브람의 후손들 우리들 쪽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언약의 모양을 바꾸시면서 까지 끝까지 자신이 세운 그 언약을 지키시는 인내의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멸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구원 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의 인자 때문 인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과 영원한 언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깨어지지 않는 영원한 언약 입니다.

히브시 기자는 히브리서 8장을 통하여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보여 주셨던 옛 언약은 장차 올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영원한 언약을 예표하는 그림자였다고 말합니다.

히 9:12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은 없어질 언약이 아니라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히8:13)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유월절 예식을 지키시며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나누시면서 이 언약식을 맺으십니다. (막 14:22-26)

" 떡을 떼며 축하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는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4)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 언약은 장차 다시 변형되어질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친히 그 언약을 보증할 쪼개진 짐슴의 몸으로, 또 피가 되신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 얼마나 놀라운 언약 입니까?



이것은 마치 요나단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 다윗이 아무것도 요나단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헤세드, 즉 여호와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맺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의 인자, 헤세드의 사랑으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아 ! 놀라운 그림입니다. 요나단이 자신의 왕자의 자리, 그리고 더 나아가 왕의 보좌를 다윗을 위하여 버렸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모든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친히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고 말씀 하십니다. 요한복음 1:14, 빌립보서 2:5-12)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언약을 맺으실때, 여러분이 그 분을 위하여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시고 그 분 자신이 친히 쪼개신 짐슴사이로 지나가셨던 하나님처럼, 그분이 친히 영문밖으로 나아가서 그 분의 언약을 성취 하셨던 것입니다.





4. 다윗은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요나단의 모든 것을 받습니다.



다시 사무엘상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을때에 그가 갖고 있었던 모든것을 다윗에게 줍니다.

4절에 보니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겉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왕자의 신분은 그의 겉옷을 통하여 나타내어 집니다. 겉옷은 신분인 동시에 그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진 것은 자신의 신분을 내어 던지는 것과 같은 심각한 행동이고 의식 인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보좌를 버리셨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실때 그 분의 겉옷은 벗겨졌고 찟져졌던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이를때에 의의 세마포를 입게 하신다고 말씀 하십니다.

다윗은 목동에서 왕자와 같은 신분으로 사람들의 존귀를 얻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옷을 입고 다닐때 사람들은 다윗이 요나단에게 중요한 사람, 즉 그와 같은 동일한 존귀함을 사람들에게서 얻게 될 것입니다.

4절에 성경은 또 요나단이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 띠도 그리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띠는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남자가 띠(벨트, belt)를 찬다는 것은 그가 사용하는 모든 군장들을 달고 거닐게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물품입니다. 띠에 그는 칼을 차게 됩니다. 띠에 활을 매답니다.

즉 그것은 그사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힘, 권능을 상징하는 표지 인 것입니다.

즉 요나단의 모든 권한을 다윗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니 사람들이 다윗을 다른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존귀한 자로 인정하기 시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의 비밀을 우리가 알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자 인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눈으로 우리를 인정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띠를 우리의 허리에 두르고 걷기 시작할때 다윗의 삶은 놀라운 변화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6장 14절에서 진리의 띠라고 말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 하나님의 권세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주님의 권세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네 그분의 말씀에서 입니다. 우리가 요나단의 띠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우리에게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검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권세 입니다. 말씀은 권능입니다.

이것이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속에 감춰진 비밀 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와 언약을 맺는 자들에게 감춰진 언약의 비밀인 것입니다.



사도행정 1:8절 주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이 띠로 무장할때까지 나가지 말것을 말씀 하십니다.

언약의 비밀을 이해할때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 위로부터 오는 권능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동행전은 우리에게 놀라운 비밀을 보여 줍니다.

즉 언약의 성취가 어떻게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에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처럼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할때 귀신이 굴복하고 병든자가 고침을 받고 앉은 뱅이가 일어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 !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언약을 맺었다면 우리는 그분의 전적인 보호하심, 그리고 권능 그 모든것을 우리가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당신은 주님과 함께 이 거룩한 언약에 참여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헤세드의 사랑을 인하여 당신에게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언약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축원 합니다.

2010년 9월 3일 금요일

태도 ! 당신을 변화 시키는 능력입니다. (리더십 2)

성경의 가장 중요한 중심 단어는 구속( Redemption, Salvation) 이다.

그리스도 전 생애의 가장 즁요한 사역을 한 마디로 정의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구속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속하신 구원의 증거, 그리고 구원의 실천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변화( Transformation) 일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롬 12:2 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변화를 받을 것을 촉구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 변화를 받아, 영어 성경에서는 " Be Transformed"(NIV)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 되어지는 것은 구원받기전과 구원받은 후의 삶에 변화 즉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쉬운 말로 말하면 당신이 주님을 믿은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이 달라진것이 교회를 나가고 있다는 것 외에 다른 어떤것을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리더십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크리스천 리더십과 세속적인 리더십의 차이가 무엇일까?

그것은 변화의 리더십 이라는 것이다.

Transformed Leadership "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변화를 받은 리더십이 되는 것은 우리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의 소명을 받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생각을 바꾸라" 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본다.

마음, 생각, 영어로는 Way of thinking, Conception, Perspective, Mind, 등 여러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데 결론적인 것은 우리의 삶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크리스천 리더십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 목적을 깨다는 것과 더불어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비전은 믿음의 선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을때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과 목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Revealation ! 즉 이것을 우리는 소명 또는 비전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일을 시키실때, 그 사람의 생각의 틀을 바꾸시고 난 후 부터 그 일을 시작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세상에서의 관점은 리더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이 있는가 ? 하는 것이다.

능력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Power 로도 번역할 수도 있지만 다른 단어 즉 Ability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리더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What are you able to do? 리더를 향한 세상의 요구인 셈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사람을 쓰실 때 그 사람의 능력(Ability)이 아니고 그 사람의 태도 (Attitude) 를 요구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십의 중요한 원리는 태도 ! 나를 변화 시키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리더십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발견 되어지는 공통적인 발견은 리더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Uniqueness ! 즉 리더는 그들의 추종자 Follower 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추종자들과는 다르게 생각한다.

즉 생각의 차이가 리더를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출애굽에서 가나안에 보내졌던 12명의 스파이들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가나안땅을 그들에게 약속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지식, 정보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약속은 모든 이들에게 공개되어졌고 주어진 약속인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을때 그들의 보고는 정말로 극과 극의 상반된 보고를 가져온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0명 즉 다수를 점유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가 극명하게 달랐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What make them to be different from others?



해답은 생각의 차이다. (Thinking make them to be different from others.)



그들의 생각은 극명하게 다른 보고서를 쓸 수 있었고, 그들의 긍정적인 생각은 그들의 태도를 다르게 만들었고 그들의 태도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나를 극명하게 다르게 만드는 생각과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오직 두가지 동물을 하나님의 속성과 동일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독수리이고 또 하나는 사자이다.

잘알고 있는 것처럼 독수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하늘의 왕이고 사자는 정글을 지배하는 왕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자는 리더의 정신을 갖고 있다. (Spirit of leadership)

바로 그 정신이 사자의 태도를 결정짓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리더는 다른 사람들 즉 추종자들과의 차이를 만드는 특별한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사자를 생각해 볼때 우리는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사자는 정글에서 가장 키가큰 즉 덩치가 큰 동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2) 사자는 가장 무거운 그리고 육중한 동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하마나 코끼에 비하면 사자는 게임이 안될 정도록 작은 편에 속한다.



3) 사자는 가장 지혜롭지도 않은 동물이다. 지능이 코끼리나, 원숭이, 그리고 뱀에 비해서도 딸리는 동물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자는 밀림의 지배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자를 밀림의 왕으로 지배자로 만드는 것일까.....?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 사자가 이끄는 양의 군대는 양이 이끄는 사자의 군대를 항상 이긴다."

즉 지도자는 평범하고 겁이많은 사람들을 최강의 군대로 만드는 힘과 영향력이 있는 것이다.

사자는 다른 동물들이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태도인 것이다. 사자는 먹이를 사냥할때 결코 동요함이 없다.

조용하게 아무런 두려움 없이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태도앞에 모든 동물들이 질려 버리게 되고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거대한 코끼리가, 사자보다 띄어난 지혜를 가졌고, 더큰 힘을 가졌고, 더 융즁한 덩치를 가졌음에도 토끼리는 제대로 대항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무엇이 이런 비극을 만드는 것일까? 바로 그것은 생각의 차이요 그 생각의 차이가 그들의 태도를 결정짓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자신, 자아관, 자존감에 의거해 행동을 하게 된다.

자신을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왕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고, 자신을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락없이 실패를 만들어 내고 만다.

사람의 행동은 생각의 열매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을 바꿀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모세, 기드온, 성경의 수많은 리더들을 만날때 하나님은 이들을 소명의 장으로 그들을 이끌때 마다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작업부터 하신 것을 보신다.

어린아이라고 부정적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에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어린아리라 부르지 말라고 말씀 하신다.

두려움가운데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 하신다. 내가 모세에게 함께 했던 것처럼 똑 같이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에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생각과 시선을 하나님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으로 바꾸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는가?



1. 태도는 믿음의 결과물 입니다. ( Attitude is a product of your belief)



모세가 자신을 리더로 이스라엘의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은 모세의 전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그 소명의식은 당연히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이었다.

그와 함께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너무나도 분명한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모세는 모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체계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자는 밀림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자 스스로가 밀림의 왕이라고 믿는 그의 강력한 태도때문 인 것이다.

사자는 그의 체격, 지능,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향하여 믿는 그 신념아래서 그의 밀림의 지배자로서의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능력은 우리의 내면안에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믿는 그 믿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으로부터 변화를 꿈꾸고 있다면 먼저 우리는 나 자신의 믿음의 체계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 나는 나 (I am that I am !) 라고 말씀 하신다.

예수님도 7번 I am " 설교를 하셨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당신을 누구라고 하는가 ?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을 묵상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때 당신안에는 비로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여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생각의 산물이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그 이상의 나는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지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될때 우리는 비로서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되고 그리고 우리안에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나를 향한 나의 올바른 태도는 무엇일까?



1) 내가 생각하는 나 ? ( Your perception of who you are )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수 많은 만남을 갖게 된다. 특별히 우리는 자라면서 나를 양육하고 성장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삶의 지대한 삶의 영향을 미친 것을 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우리에게 준 지대한 영향의 지배아래서 자신데 대한 자존감, 그리고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번 종이를 꺼내어 놓고 자신에 대한 당신의 느낌을 적어보라...........

나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는가?

나난 나에 대하여 얼마큼 나를 신뢰하고 있는가 ?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대하여 지독하게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가 ?

나는 나에게 영향을 끼쳤던 그 누군가가 심어놓은 생각의 씨앗의 노예가 되어 그 한계안에 갖혀져 있지는 않는가?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냐 ? 제자들에게 물어 보셨던 예수님,

그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물어 보신 주님,

마찬가지로 우리는 동일한 질문 앞에 직면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할까?

나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우리는 우리에게 심겨진 거짓된 선언(Statement)들을 뽑아 내야 할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제안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변화를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안에 내면적 변화가 일어날때 우리의 행동은 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의 내면의 자아상이 바뀌기 시작할때 사람들을 향한 나의 영향력은 증대 되어 질 것이다.



2) 나의 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Why you think you Exist)



수많은 사람들이 공허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는 것처럼 살아 간다.

그들은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연명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자신의 분명한 삶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그 어떤 긍정적인 영향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왜 이땅에 존재해야 하는 지 그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시다.

바울에게는 분명한 삶의 이유가 있었다. 그의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였다. 즉 다른 말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이며 목적이었던 것이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들, 리더십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 그리고 수많은 개인들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에 대한 분명한 방향을 잃어 버렸기에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혼돈 스러운 것이다.

창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를 완성하셨을때, 이 땅에서 공허함과 혼돈이 물러갔다.

내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그 목적을 우리에게 말씀 하심을 들을때,그것을 발견할 때 우리 인생의 공허함과 혼돈은 물러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해 줄 수 있는 리더를 갈망하고 있다.

어떻게 가야 할지는 그들이 발견해도 될 것이다.



3) 당신의 소중함을 깨달으라 ( Your sense of Significance)



우리가 이 땅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나의 정체성에 대한 당신의 관점을 바꿔라.

우리가 왜 이땅에 존재해야 하는지를 알때 우리는 비로서 리더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리더십의 가장 명료한 정의 가운데 하나를 명심하라. 리더십은 어떤 직위가 아니라, 리더십은 영향력이라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될때, 즉 그들의 인생의 소명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들은 리더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소명의식이다.

나는 이 소명때문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어 지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다른 추종자로부터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원동력의 비밀인 것이다.

성경을 읽으라 ! 하나님은 수많은 그의 종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신다.

내가 너를 불러서 선택하였노라 ! 너는 내게 아주 특별한 존재이다.

이러한 소명의식이 우리 안에 싹트기 시작하고 자라나기 시작할때 우리는 서서히 우리안에 있는 지도력을 발견하며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지도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태도가 그 사람을 지도자로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그분의 일을 하시겠다고 말씀 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 하신다.

나는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사자가 밀림의 지배자라고 생각하는 그 태도가 그를 정글의 지배자로 만들었던 것처럼 당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선택된 소명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당신을 향한 당신의 태도를 결정할때 그때 비로서 당신안에 감춰저 있는 능력을 보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태도, 당신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바꿀때에 당신은 세상을 변화 시키는 능력있는 지도가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을 향하여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