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7일 일요일

A man who has different spirit !(민14:24)

1. 신앙은 신비의 경험입니다.





신앙은 정말로 신비의 세계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쉽고 단순하게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많은 신비의 영역이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A Nature of God) 을 이해 할때면 우리의 인간의 이성적 범주에서는 너무나 이해하기 힘든 때가 참으로 많으니 말이다.

민수기를 읽다가 참으로 남감한 장면을 만난다.



이스라엘이 430년동안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는동안 그들의 고통을 신원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행하시는 장면을 본다.

10가지의 재앙을 통해 바로를 무력화 하고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때 온갖 금은보화를 애굽사람들로부터 받게 하시고 심지어는 애굽사람들까지 이스라엘 사람을 따라 출애굽 구원의 여정을 떠나는 놀라운 역사를 행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나안을 그들이 살수 있는 그리고 살아야 할 약속의 땅으로 주시고 가나안땅을 정복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바로의 병거가 이스라엘을 추적할때 그들앞에 놓여진 홍해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가르시고, 광야를 다니는 동안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을 안내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하심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모세에게 명하여 그들이 정복할 땅을 눈앞에 두게 하시고

정탐군을 보내어 그 땅을 정탐할 것을 말씀 하신다.

그래서 모세는 각 12지파를 따라서 정탐꾼을 선발할것을 명하여 가나안에 들어갈 정보부대를 창설한다.

민수기 13장은 이 정탐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장인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신이 주실 약속한 땅을 주시기 전에 이 땅을 정탐하라고 명령 하셨을까?

하나님이 친히 앞서서 그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시면 될 텐데 왜 광야에서도 하지 않았던 전쟁을 자신이 약속한 땅에서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



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신앙의 여정의 계획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이 바로의 꺽으며 애굽을 건너게 하는 데 이스라엘이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때 그들이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셨고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였다.



구원의 비밀인 것이다.

구원을 계획하는 일도, 구원을 이루는 일도 우리는 어떤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여호와께 속한 것이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2:8-9 절은 "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 라고 말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 그 일을 바라보고 받아 들이는 것이다.

구원의 믿음은 받아 들임의 믿음인 것이다.



민13장에 이스라엘의 정탐꾼은 가나안땅에 들어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40일 동안을 그 땅을 경험하게 하신다.

그들의 광야생활의 40년과 가나안땅의 40일은 정말로 전혀 다른 경험인 것이다.

민13:27에 이스라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을 수 있다.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데 ....... "

과연 그 땅은 하나님이 말씀 하신대로 비옥한 땅이었고 모든 과실또한 얼마나 큰지....포도송이 하나를 장정 구 사람이 막개기에 꿰어 메고 다닐 정도 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신실하시고 참되시며 진실하심을 확인 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틀려본적이 있는가?



2.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과의 차이를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그런데 민13:28 ~29 절에 보면 이스라엘 정탐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 로 시작되는 그들의 보고는 그들이 현실을 보는 그들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성읍은 견고하고.....심히 클 뿐 아니라......거기서 전설속에서만 듣던 아낙자손( 네피림의 후손들v33)을 보았고........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v33)



신앙을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과 흡사하지 않은가?

신앙의 갈등은 여기서 부터 출발한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비전과 우리의 현실과의 차이, 갭인 것이다.

어린아이와 거인의 차이가 아니라..... 거인과 메뚜기......

현실에서 경험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능력은 항상 이러한 큰 차이를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맏기신 적은 없으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우리가 한다면 우리는 항상 우리가 성취한 그 일에 매료되어 자신을 높이는 일에 현안이 될 수 있으런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맏기심으로 우리 자신의 신앙을 테스트하시면서 신앙과 현실의 차이 사이에서 우리의 참된 신앙의 태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시련을 경험해 보지 못한 신앙은 신앙일 수 없는 지도 모른다.

바울은 로마에서 더더욱 " 시련이 없는 사람은 사생자요......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시련은 연단을 연단은 인내를 인내는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너희가 시련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뻐하라고 말씀 하신다.

왜냐하면 그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지난 8년동안 가나안땅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사람처럼 이 땅을 정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많은 이들이 뉴질랜드를 다녀가며 이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 같다고 아름다운 땅 축복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ICINZ을 지나가는 많은 이들이 이 곳에 왜 선교사 훈련센터가 있어야 되는지.....그리고 앞으로 선교사들을 쉬게 하고 재충전하는 일을 위해서 얼마나 적합한지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소릴르 듣는다.



그런데.......우리가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약속의 땅일 수 있고 또 그러한 축복의 조건을 가진것을 우리가 다 알고 동의할 수 있지만.....마치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 하는 이스라엘 정탐꾼 처럼.............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이성적 판단과 보고를 듣게 되는 것이다.



나는 늘 이 현실과 비전, 현실과 하나님의 약속이 갶이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경험하여 왔다.

이것이 신앙의 딜렘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이런한 모습이 아닐런지..............?

비행사들의 훈련중 가장 어려운 것이 계기비행을 시작하는 것이란다.

고공의 창공에서 육안으로 비행하는 시계비행은 저속의 항공기 일때 가능한 일지만 수천피트 수만피트의 창공에서 음속의 비행기를 모는 일은 시계비행으로 이미 불가능한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지형표시로 삼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에....그는 자신의 육안으로 도저히 느낄수 없는 숫자의 정보만을 갖고.....그 계기를 의지하여 비행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조종사들은 그 계기비행의 순간이 조종사에게 가장 불안했던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의 경험과 지식과, 정보와 이성적인 합지적인 조건과 대안이 아니라.......마치 현실과는 아루런 관련이 없는 하나님의 비전의 지도만을 갖고 나의 전 인생을 여행한다는 일은 가장 불안한 삶의 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지난 8년을 계기비행을 하는 조종사처럼 우리 가족을 이끌고......이 가나안땅을 정복해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3. 신앙은 불순종과의 싸움입니다.



민13:26~33 에서 정탘꾼들의 보고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는것만 같아 보인다.

현실에의 인식, 자각, 이럴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주 현실의 노예가 되어 불안이라는 감옥에 갖힌 죄수처럼 그 공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미난 일은 불순종은 항상 회한에서 시작됩니다.

차라리 예수 믿지 않았을때는 자유라도 있었는데, 재미라도 있었는데.........

차라리 그 때가 더 나았어........

민14:1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 우리가 애굽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것을............. v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리 애굽으로 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여러분의 지금의 삶의 모습은 어떤가요?

당신은 과거를 회상하며.......차라리 내가 살아왔던 그 때가 더 낫다고 생각하며 회한의 원망에 가득차 있지는 않는지요?

거기다가 조직적인 움직임을 시작하지는 않는지요?

v4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 두종류의 리더십 *



여기에 보니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봅니다.



1)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십



즉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불신앙, 불순종의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부정적인 생각을 마치 절대적인 진리인것처럼 믿으며 그것을 설파하며 무리를 모으는 부정적 영향력의 리더십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은 항상 무리를 짓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쩌면 범죄하는 사람이 항상 단독으로 범행하기 보다는 자기를 동조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행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원수 마귀는 항상 자리를 추종하는 귀신들의 무리와 자리를 따르는 불순종의 아들들 이 풍속을 쫒는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어......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 왕 노릇 하는 마귀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민14:4)



여러분 ! 조심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에 있다면 나는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로 살고 있는지? 조심 스럽게 자신을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당신이 있다면 당신의 영향력은 더 클 것입니다.



2)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십



그런데 하나님은 역사를 이루는 데에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하신 대로 믿고 따르는 믿음의 리더십이 있다는 것입니다.

v6~10

수많은 사람들이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순간에 가나안땅을 정탐했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의 옷을 찢습니다.

극한 슬픔의 표현입니다.

극한 절망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긍정의 힘을 설파 하기 시작합니다.

v7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입니다. "

v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 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시며.......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

V9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지 마십시오.....또 그 백성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먹이입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고......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



아 !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이것은 긍정의 힘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보는 눈을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정의 이유를 찾아낼때 신앙의 사람은 긍정의 이유를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2:10의 표대결에서 신앙의 눈으로 긍정의 믿음을 설파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소수였습니다.

민주주의 원칙대로라면 우리는 다수의 힘을 이길 힘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항상 수많은 부정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힌 다수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논리로 이길 힘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길 힘은 여호와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노로 돌에 맞으려 할때 여호와께서는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 주십니다.

아 !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비밀입니다.

오늘 교회는 세상의 밥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돌을 집어 들고 교회를 치려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우리의 위기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앙의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사단의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부활의 영광이 주님위에 임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칼의 힘이 아니라, 권력의 힘이 아니라.......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여호와의 거룩의 영광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막 가운데 영광으로 거하셨던 주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 ! 하나님 ! 이 곳 ICINZ에 당신의 영광이 거하게 하소서.....

부정의 말들이 사라지고 원망의 말들이 사라지고.......

여호와의 영광을 선포하며 찬미와 감사의 고백들이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 제가 다시 당신앞에 그렇게 서기를 원합니다.

내 입술에서 모든 원망의 말이 사라지게 하시고....영광과 찬미와 감사와 긍정의 말들이 있게 하여 주시고....긍정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



4. 하나님은 그 마음이 다른 자를 찾습니다.



하나님은 진노 하십니다.

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겠다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와 다시 딜(deal)을 하시기를 원하는 모습을 봅니다.

v14:12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



지도자의 딜렘마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을때 네 주님 그렇게 하십시오 ! 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변호하는 변호사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마치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서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금 모세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 당신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만일 애굽 사람들이 가나안의 거민들이 당신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실 능력이 없으셔서 이들을 다 이곳에서 죽이셨다고 하면 당신의 이름의 영광은 어찌 되겠습니까?

하나님 맞습니다.

백성들의 잘 못한것이 맞고 불순종한것이 맞지만............

하지만 당신이 이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고 이들을 축복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이들을 진멸하였다 하면.....

당신의 이름의 평판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14:16~17



이곳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모세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모세가 어떤 리더가 되었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중보자요 중재자요......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백성을 사랑하며 구원하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닮은 리더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참으로 선한목자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기독교 지도자로 사역할때...... 원망과 시비의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럴때마다......

실망과 분노에 가득차서....하나님 저들을 맘대로 하십시오" 라고 손을 놓고 싶을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셨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깊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참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리고 한가지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용서하시지만 당신은 당신의 공의를 실현 하신는 하나님 이신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용서를 받았지만 불평하고 원망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부분이 약속의 땅을 밟아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라웁게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기억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갈렙을 향하여 말하기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민14:24 "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아 !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인가요........?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오 주님 ! 제가 갈렙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내가 밟았던 이 땅에 다시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그리하여 당신의 이름을 높이며......온전히 여호와가 통치하시고 소유하는 ICINZ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이곳에서 당신의 안식의 축복이 실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이곳에서 당신의 샬롬이 이루어 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

이곳에서 부정한 생각과 불순종이 사라지고 순종과 긍정의 믿음을 경험하는 변화의 체험이 있는 여호와의 영광이 임재하는 땅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나의 마음이 다르게 도와 주시옵소서 !

나의 생각이 다르게 도와 주시옵소서 !

나의 행동이 다르게 도와 주시옵소서 !



주여 ! 이곳이 거룩한 당신의 영광이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아멘 !

2010년 10월 13일 수요일

가짜가 진짜를 대신할때......(왕상 12:25-33)

한국인 처럼 진짜에 목말라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진짜에 목숨을 걸었으면 참기름인데 순참기름이라 합니다. 진짜 순 참기름까지 나오는 판입니다. 영적인 가치에 있어서도 진리가 아니라 참진리라고 붙입니다.

요즘은 가짜가 너무 진짜 같아서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가 참 많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혹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영적인 생활과 삶에도 일어나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은 각세대마다 이처럼 영적인 배교와 타락에 대하여 아주 분명한 말씀을 전하여 주십니다.

10계명에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지 말 것을 말씀 하십니다.

우상이란 참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표현에 gods라고 표현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God이 아니라 gods입니다.

어찌하면 하나님과 거의 비슷한 기능과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창세이래로 우리는 영적인 타락이후로 이러한 진리와 진실에 대한 영적분별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아 왔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변질한 사단의 궤교에 하와는 진짜같은 가짜의 영적인 deception즉 속임에 빠져 인류전체에 커다란 재앙을 가져 옵니다.

말세에는 더더욱 이러한 영적인 속임수, 거짓진리,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날 것을 말씀합니다. (마24:14) 이것이 주님의 재림, 즉 말세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각 세대에 나타나는 영적인 배교, 그리고 속임에 대한 분명한 경고를 보여 주는 사건을 우리에게 소개 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로보암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영적생활에 대한 무서운 경고를 들려 주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왕의 실정과 배교로 인하여 그를 경계하고 견책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웠던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실때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존귀히 여기며 주의 법도를 따하 행하면 다윗에게 행했던 것처럼 그를, 그의 나라를 축복하실것을 약속 하십니다. (왕상 11:38)

이 점에 보면 그는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왕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영적인 경험을 따지자면 그는 하나님을 체험한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율법과는 전혀 동떨어진 배교의 길을 걷게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의하여 세워진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그는 그의 통치를 통하여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그러한 나라를 세울 기회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정말로 다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1. 그는 하나님의 왕국이 아닌 자신의 왕국을 건설합니다.

그에게는 놀라운 통치력이 있었음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열지파가 그에게 속한 것을 보면 이는 엄청난 축복이요 이를 통치하는 그는 놀라운 정치력을 가진 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이 놀라운 축복을 사용하여 그의 성읍, 도시들을 건설하면서 왕국을 건설하여 나가지만 이는 하나님의 세우시는 왕국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따라 세워 가는 인간적인 개인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현대교회에 이루어 지는 가장 위험한 타락이 교회 가운데 이루어 지는 마치 교회를 교회 지도자의 또는 교회의 일련의 리더십 그룹이 마치 자기왕국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교회성장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 되어 집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여로보암이 행했던, 영적기만이라고 믿습니다.

마치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여러곳에 도시를 건설하지만 이 도시들은 하나님의 도성이 아니라 여로보암 자신의 도성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v27절에 보니까, 유다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가 제사를 드릴때에 그들이 변하여 유다왕국에 남으며 자신을 배반할까봐 자신의 도성을 건설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중세에 이르러 교회는 일반인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까봐 하나님의 말씀을 사제들에게만 허용하고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모든 권한을 사제, 교황권에 한하여 제한 하였던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리고 그들은 엄청난 영적 권한을 그리고 나중에는 정치력 권한까지 소유하였던 것을 보게 되어 집니다. 중세의 카톨릭은 마치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참된 장소에서 참된 예배를 두려워 하여 대체제사를 만들었던 것과 같은 영적 기만을 행하였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알게 되어 집니다.



2. 여로보암은 영적인 기만을 통하여 거짓 예배, 거짓 영성을 만듭니다.

v28에 보니까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가 예배할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계획하여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 이스라엘아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 갈것이 없도다,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말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영적인 기만에 속아 넘어 갑니다.

이들에게는 참된 예배와 제사가 아닌, 진정한 예배와 제사를 대체한 유사제사와 유사 예배를 드리는 오늘날 교회에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남을 봅니다.

수많은 가르침들이,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만족시키며 그들을 위한 그들의 종교를 만드는 정교중독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가르치고 예배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육신과 그들에게 의미와 만족을 줄 수 있는 유사기독교적 가르침을 통하여 깊은 영적기만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는가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면 당신은 깊은 영적기만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 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위해 존재하는 여러분의 우상을 구하고 있는것은 아닌지요?



3. 여로보암은 거짓 영성을 통해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v 29-32 절 말씀에 보니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그들의 산당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산당을 섬길 제사장을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호와의 절기가 아닌 유사한 그들만의 절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이 시대에 일어난 것처럼 건물에 관심을 갖습니다.

산당을 짓는 것처럼, 그들은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와 건물에 더 깊은 관심을 두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비극입니다.

또 하나의 무서운 것은 순결치 못한 제사장 제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레위 지파에서 삼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레위지파가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는 엄청난 불순종을 자행 합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영적제도와 그리고 교권주의등 그들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과 기름부으심과 상관이 없는 보통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는 일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수많은 신학생들이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배출 됩니다.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부르신 영적 소명에 분명한 간증과 증거가 있는 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제자 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제자중 지원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적 사역에는 지원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고 뽑으신 자를 통하여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만입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여 나아갈때 하나님의 분명하신 부르심과 뜻을 분별하는 분명한 간증과 확증이 있어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절기를 지키게 합니다.

이것은 진리를 희석시키고 인간적인 제도나 규례를 통하여 여호와의 명하신 절기와 상관없는 자기들의 절기를 만들어 지키는 엄청난 불순종을 범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4. 영적 기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뜻을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정한...........33절의 말씀에 보니 자기 마음대로" 라고 말씀 하십니다.

주님의 로드십이 없습니다. 주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주님을 섬기되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데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워스트한 영적 기만인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진정한 영성은 그리스도의 주권아래 무릎을 꿇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십니까? 아니면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뜻을 따라 주님을 순종하십니까?

2010년 10월 11일 월요일

꿈을 꾸기를 원한다면........

잠들기 전에,



정신의학자들은 자신이 꾸고 싶은 꿈을 꾸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잠들기전에 그 날 있었던 일을 적어 두는 등 문제나 걱정거리를 세밀하게 생각해 놓는다.

그런 뒤 꿈에 이런 문제들에 대해 응답이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세피드 코미나스의 [ 치유의 글쓰기] 중에서...



성경의 이야기중에 야곱의 꿈(창 28:10-22)은 매우 진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장자의 축복권을 교활한 방법으로 그의 형 에서로 부터 빼았는다. 그리고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그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난을 가기 위하여 긴 여행을 떠난다.

얼마나 긴 여행이었을까?

얼마나 외로운 여행이었을까? 얼마나 처량한 여행이었을까?

그야 말로 그는 외로운 방랑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의 인생이 그런 모습이 않을까? 우리가 최상 이라고 붙잡았던 것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안식과 쉼을 가져다 주지 못함이 야곱의 야망에 찬 장자권이 그것과 비할바 못되는 것 같다.



1. 꿈은 인생의 가장 외로운 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에게 꿈이 필요한 때는 인생의 정점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종종 우리가 꿈을 꿀때는 성경의 야곱과 같이 인생의 가장 외로운 순간에, 인생의 바닥에 있을때

필요한 것이다. 가장 외로운 순간에, 가장 험난한 인생의 순간에 우리는 꿈을 갖게 되고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는 여행중의 한 들판에서 한 돌을 베고 잠을 자다. 꿈을 꾸게 되었던 것이다. (v11-15)

와, 돌을 베고 잠을 청할 정도로 그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정말로 인생의 가장 bottom line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하늘과 연결되어지는 꿈을 꾸게 된다.



2. 세상의 꿈이 하니라 하늘의 꿈을 꾸어라 !

성경은 야곱이 하늘문과 연결되는, 즉 주의 천산들이 하늘을 오르 내리는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꿈이 이 땅에만 존재하는 그리고 이 땅에만 속한 것이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그리고 이땅에 속하여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꾸는 그 꿈이 영원한 가치를 지닌 천상의 것, 하늘의 것, 하나님 나라에 속한 꿈이기를 바라신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나의 꿈이 과연 하나님 나라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 꿈이 이루어 질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 되어질 수 있는, 그리고 영원히 존속하는 영원한 가치를 가진 그런 꿈을 나는 갖고 살아 가는 것일까?

만일 이 땅에만 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꿈이 아니라 그것은 한 낱 욕심에 불과한 것이다.



3. 꿈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아라 !

야곱은 꿈에서 하나님을 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야곱은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하나님의 꿈을 본 것이다.

내가 하늘의 문을 열고 하늘의 음성을 들을 때 그 꿈은 단순히 나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으로 바뀌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를 축복하신다고 말씀 하신다.

수많은 자손이 그를 통하여 나올 것이라고 말씀 하신다.

왜 하나님은 에서에게 그 꿈을 말씀 하시지 않고 교화하기까지 한 야곱에게 그분의 꿈을 말씀 하시는 것일까?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야곱은 하늘 나라에 대한 가치를 보았던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을 걸고라도 그는 하나님의 축복,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동일한 약속의 축복을 갈망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하늘 나라를 사모하는 강렬한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이 열망이야말로 하나님이 찾는 예배자의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전심으로 찾는 자를 찾으신다" 말씀 하신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 하지 않으셨던가 ?

예수님은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자기를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 하신다.

야곱 ! 그는 비록 형을 속이는 것 같으나...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자 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야곱을 하나님은 이쁘게 보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하늘 나라의 계획을 말씀 하셨던 것이다.



4. 우리가 하나님의 꿈을 꿀때 하나님의 임재는 떠나지 아니 하신다.



15절에 보니 하나님이 약속하여 주시기를 "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 하신지라..."

아 하나님이 그 꿈이 이루어 지기까지 떠나지 아니 하시겠다니.....

이 말은 내가 하나님 안에서 그 꿈을 이루기 까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내가 하나님 나라의 꿈을 꿀때 내 사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은 결단코 나를 버리시지, 떠나시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아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요 은혜인 것이다.



5. 하나님의 꿈은 삶의 환경을 바꾸어 놓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을 통하여 그의 인생의 변화를 경험 하는가?

아브라함 링컨과 같이, 월트 디즈니와 같이, 꿈을 가진 사람은 그의 인생이 변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성경은 야곱이 자기가 잠자고 꿈꾸었던 곳을 벧엘 이라고 지었다.

벧엘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곳이 원래 루스라는 지역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 안에서 꿈을 꿀때, 그 꿈을 꾸는 사람을 통하여 그곳은 거룩한 하나님의 땅이 되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장소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은 신약에 와서는 그곳은 교회를 말씀 하신다.

왜냐하면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 들중에 함께 있느니라고 말씀 하시지 않으셨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인가? 당신은 하나님의 꿈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오늘 당신이 꿈을 꾸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과 상세한 내역을 거래 하기를 원한다.

마치 야곱이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서원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당신의 꿈을 나누어라.

그럴때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꿈을 꿀 것이다.

2010년 9월 22일 수요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 (사43:1-7)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일까?

사람들이 가슴 속에서 터져 오르는 강한 열망으로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일까?

사람마다 사는 시대가 다르고 또 사는 모양이 다르지만 동.서를 떠나 인간의 심성속에 뿌리박혀 있는 본능 같은 열망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 당신을 사랑합니다. ! " 당신은 나에게 소중한 존재 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 믿는다.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이 태어나서 인성이 형성되는 시기를 0~3세 때의 시기를 가장 중요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나의 인성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라는 사실이다.

양육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사람은 "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 인가? " 하는 정보를 입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라나서 5세이전에 일어난 경험들을 기억하기에 힘이 든다. 하지만 그 무수한 경험과 기억들은 나의 무의식의 창고에 저장이 되어 나를 바라보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 누군가에 의해서 소중한 존재로 인식되고 사랑을 받은 아이는 건강한 자존감을 통하여 충분히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그리고 지식적인 정보를 접하면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날 성경을 보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구절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이러한 존재와 가치관을 형성하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치유와 자아상을 형성하는 과정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갖고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이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이사야 43:1-7절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는 메세지를 들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한다.



1.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의 근원임을 말씀 하신다.



v1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야곱" 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인용하신다.

여기에서 야곱은 야곱 개인이기 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읕 통칭하는 대명사로서 쓰여지고 있음을 본다.

즉 하나님이 야곱이라고 부르시는 이 부르심 속에는 바로 나와 너 우리 모두가 포함되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우리 개개인 한 사람을 기억하시고 그의 마음속에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다니.......

그리고 그분이 나의 이름을 기억하시다니......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치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고아처럼 지내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부모님이 친척에게 아이를 맞겨놓고 먼 여행을 떠났다. 타고가던 배가 풍랑을 맞아 좌초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아이를 맡은 친척은 이 아이를 고아처럼 그리고 마치 그 집안의 하녀처럼 대하며 부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고생을 하던 이 아이에게 어느날 아주 멋진 신사부부가 찾아온다.

그리고 이 소녀를 안으며 고백 하기를 " 내가 낳은 엄마, 그리고 아빠"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풍랑에 좌초 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았던 아이의 부모는 수년동안을 한번도 자기의 딸을 잊어 버린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아이를 찾아 자신이 아이의 부모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아이는 드디어 행복한 삶을 산다는 동화의 이야기다.

나는 마치 오늘 이사야 말씀을 통하여 전하시는 이 말씀이야 말로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지위를 잃어 버리고 죄의 노예로 살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구원의 메세지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 내가 너를 낳았다" 라고 말씀 하시는 하나님 !

성령으로 우리가 그 분안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 이십니다. (God is our protector)

V2-3절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분이 우리의 구원하 그리고 보호자 이심을 선포 하십니다.

"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이 말씀은 무슨 말씀 인가요? 이 말씀은 우리아 어떤한 상황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분이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약속의 말씀 인 것입니다.

마치 시23편의 말씀을 연상 시키는 것처럼.......심지어는 우리가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 찌라도 그분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의 근원을 확인 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뿌리를 확인 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고 우리의 근본을 확인시킴으로써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기에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접한다 할지라도 그분이 우리의 친히 구원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은 어떤 일을 행함에 두려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내가 처한 일 때문에 두려움 가운데 있지는 않나요?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위기 가운데 있을때 그 분이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 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께 존귀한 자입니다. ( We are precious being before Him)



v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세어 가장 아름다운 고백을 하여 주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에게 이런 고백을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친구에게, 배우자에게 이러한 고백을 들어 보신적이 있나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기를 내가 그 분 시선에, 그 분 앞에 참으로 존귀한 자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 분앞에 보배로운 존재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아 ! 험난한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나의 무기력함과 연약함으로 인하여 나의 존재감, 그리고 나의 가치들을 잃어 버린채 사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놀라운 사랑의 고백을 하시는 것입니다.



" 너는 내게 보배로운 존재야 ......!

너는 내게 존귀한 자야.....! 왜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 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존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 인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존귀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하심의 약속은 항상 그 분의 동행 하심으로 나타 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동안이나 동행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수십년간을 동행 합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과 40년을 동행 합니다.

노아는 1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 합니다.

성경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분모가 있다면 그 들 모두는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할때 우리의 삶은 안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 할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 할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목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 할때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 것을 말씀 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말씀 하십니다.

마치 여호수아를 격려하며 말씀 하셨던 것처럼.......하나님은 나의 인생과 함께 하실것을 말씀 하시면서 우리에게 두려워 말것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부터 저는 여호와의 구원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역사를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축복을 구하지 않으렵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의 동행함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임재를 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임재와 동행하심은 내가 구하는 어떤 것보다 우선하며 위대하며, 그리고 가장 절실한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으로 부터 이러한 동행하심의 약속을 들으셨습니까?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약속, 아름다운 소리, 아름다운 언약 !

저는 바로 오늘 이사야 43:1-7절을 통해서 주신 말씀 이라 믿습니다.



저는 오늘 주님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오 하나님 ! 저로 당신과 동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

2010년 9월 9일 목요일

당신의 안전 지대를 떠나라 !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



아브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 지금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라는 음성을 듣는다.



노년의 나이에 자신이 정착했단 곳을 떠난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인간이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심리적인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분리의 두려움이라고 한다.

아기들은 가장 본성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들을 살펴보면 아이들이 제일 두려워 하는 순간이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이다. 엄마의 얼굴이 보이지 않은 것이 자신이 엄마로 분리 되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분리가 가져다 주는 두려움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장 재미 있어 하는 놀이가 소위 "까꿍" 놀이이다. 엄마나, 누나가 눈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서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아이의 긴장됬던 마음이 녹아 내리고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띄는 아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를 얼마나 미소짓게 하는 일인지 모른다.

사랑하는 존재가 눈 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아가의 표정이 긴장감에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 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 다음 아이가 자라나서 좋아하는 놀이가 술레잡기라는 놀이다. " Seek and Hide " 라 불리우는 이 놀이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다 존재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아이들은 구석진 곳을 좋아한다. 장농속이든, 책상 밑이든, 그리고 남자 아이들은 나무밑에 나무 가지들을 꺽어서 만들어 놓은 자신들만의 비밀스런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무의식 가운데 모태 가운데 있었던 그 환경을 만들어 놓으며 안전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이가 태줄을 끊고 세상에 나오는 것은 실로 하나의 충격이다.

마치 우주선이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 날 때 엄청난 충격을 경험하는 것처럼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충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최초의 분리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분리를 두려워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신이 자라나고 태어났던 고향을 찾는 귀소 본능이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이 에덴에서의 범죄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 가운데 하나인 죽음의 형벌을 예견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죽음" 이란 바로 분이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지는 두려움, 자신으로부터의 분리인 것이다.

그러기에 분리란 고통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인간의 업보 가운데 하나를 헤어짐" 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정착하여 살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 하신다.

왜 일까?

하나님은 왜 이 노년의 남자인 아브라함에게 떠나라는 명령을 하신 것일까?

그가 젊은 청년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왜 가여운 이 노년의 남자인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광대한 뜻을 이해할 길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이해하고 따를 하나님의 친구를 찾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창세기 첫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 하시고 주신 명령 가운데 하나가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 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땅에 충만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지속적으로 흩어지고 이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창 11:4 절에 보니까 "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라며 하나님의 계획에 반기를 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끝임없이 안전을 추구한다. 설령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대치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안전지대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성을 쌓음으로써 자신들을 보호하는 그들의 안전지대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산성이고 보호이시기를 원하시는데도 말이다.



몽골의 위대한 정복자 징기스칸은 그의 아들들에게 " 성을 수축하면 망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

역사에 보면 터키족의 조상이었던 돌궐족의 장수였던 돈유쿠크는 그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새겼다고 한다.

" 길을 뚫는 자는 번영하고 성을 쌓는자는 망한다. "

아 얼마나 놀라운 통찰력인가..............? 유목민이었던 몽고족이 성을 쌓아 정착함으로 유목민족의 기질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한 징기스칸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정복자들이 성을 쌓다가 망하였는가............

인공위성에서 조차 쉽게 분별해 낼 수 있었던 만리장성을 쌓던 중국의 왕조는 성을 쌓으며 망하여 갔던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고향을 떠나라고 하신다. 그의 가족을 떠나라고 하신다.

그리고 어디 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 하신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두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가야할 목적지도 분명하지 않은 여행을 떠나는 그것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여행이 아니라 돌아옴이 약속되지 않은 여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구하시는 구원의 방편 이었음을 생각해 본다.

그가 살고 있었던 갈대아 우르는 그 당시에 물류가 교통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월신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땅이었음을 창11장 후반부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물질주의의 노예로 살아 갈 수 있었고, 여호와 하나님과 상관없는 다원주의적 사고에 길들여저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아야 했을 지도 모른다.



1. 떠남은 우리에게 가야할 목적지가 필요로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가 있어야 함을 알려준다.

우리는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장소를 떠나 볼때,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가치와 목적이 필요로 함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집을 떠 날때 목적지 없이 떠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있는 것을 버리라 하실때면 다른 것이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며, 우리로 하여금 있는 곳을 떠나라 하시면 가야할 곳이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 떠나라" 는 음성을 들을 때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실 곳을 향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2. 떠나라 하시면 그것은 동행 하시겠다는 뜻이다.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말씀 하셨다. 그리고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고 말씀 하신다.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님이 보여준 땅이 아니라 보여줄 땅이라 말씀 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은 주님이 우리가 당도해야 할 그 땅에 도착하게 되기까지 주님이 함께 동행 하시겠다는 것이다.

왜 나는 한번도 그 생각을 미처 해 보지 못했을까........?

왜 나는 그것을 두려움이라고만 생각하고, 어쩌면 하나님이 참 심술 굿은 아버지의 모습만을 떠 올린 것일까? 왜 나는 그것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총이고 사랑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두려움으로 떠나지만 아브라함이 그 긴 여행동안 하나님 아버지와의 긴밀하고도 친밀한 대화와 교제가 그리고 그 분의 공급하심이 함께 따랐음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그 길이 얼마나 달콤한 하나님과의 밀월의 시간이었음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브라함을 떠나라고 하실때는 그 말은 하나님이 그와 동행 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을 .......

이 생각에 미치자 나는 마태복음 28:18-20 절까지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을 남기실때

주님도 가라고 말씀 하시며........후반절에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시니 말이다.

떠나라고 하시는 말씀은 동행하시겠다는 그 분의 약속이 있음을 생각해 보자.



3. 우리는 떠 날때 비로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어떤 맘으로 자기의 집을 떠났는지 그의 속을 알수 없지만.....그가 갈대랄 우르를 떠나 하나님가의 동행에 나섰을 때 아르라함은 그가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축복을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대근동의 역사에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는 거부가 되었고 주변 민족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가 떠나는 것을 거부하였다면 그는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그가 누렸던 수많은 축복, 그리고 그가 평생에 갖지 못했던 자신의 후사를 잇는 이삭을 얻는 놀라운 기적을 그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1989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 떠남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나는 크고 작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주님의 역사와 일들을 볼 수 있었다. 전쟁중인 이락의 최 전선에 서보기도 했고, 선교의 중심이었던 영국의 런던의 한 복판에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경험해 보기도 하였다.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경험할 수 없고 누릴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을 ......



어느날 베드로와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갈리리 바다를 여행 한다. 밤이 되자 날씨는 급변하여 바다에 놀라운 폭풍이 몰아친다. 그 때 바다위로 예수님이 걸어 오신다. 모두들 유령인줄 알고 두려움 가운데 있을때 베드로는 주님께 말한다. 주님 당신이거든 저를 명하여 물위를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

참으로 황당한 요구이다.

그런데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위를 걸으라 명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것은 보트를 떠나는 것이다. 보트를 걸어나오지 않고서는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 기적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떠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놀라운 역사를 경함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믿음으로 비전을 품고 보트를 떠나 나올 때 우리는 비로서 물 위를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의 비밀인 것이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앞으로 20년 후에 당신은 저지른 일보다는 저지르지 않은 일에 더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밧줄을 풀고 안전한 항구를 벗어나 항해를 떠나라.
돛에 무역풍을 가득 담고 탐험하고, 꿈꾸며, 발견하라.” 고 했다.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나이 74세에 유명한 철학 책인 『순수이성비판』과『실천이상비판』을 썼다.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는 85세에 명곡 “아베마리아”를 작곡했다. 시인 테니슨은 80세가 되어 “죽음을 향해”라는 시를 세상에 내놓았고. 괴테는 80세에 역작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안에 더 새로워지고 온전해지기 원하는 꿈이 있느냐이다.



그렇다.

우리가 우리 가슴에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이루기를 꿈꾸는 꿈이 있다면, 두려움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전지대를 과감히 떠나야 한다.

그럴때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경험하며,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크고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주의 음성을 들으며 당신의 안전 지대를 떠 날 준비가 되었는가 ?

2010년 9월 8일 수요일

당신의 인생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 !!!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 창 12:1



우리는 인생의 많은 것을 아르라함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든지 부르실 수 있다는 점이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거부했다거나 아니면 양해를 구하며 연기를 했다거나, 아니면 부르심을 피하여 요나처럼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없다.



아마도 그의 대답은 " 예 하나님, Yes, Lord, I will go ! 제가 가겠습니다" 라고 했을 것이다.

창12장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는 장면을 서술 했을 때,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렀다" 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성경이 아브라함의 그 이전의 삶을 상세히 서울하지는 않아도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는 분명히 그를 부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미 창 11장을 통해서 우리는 바벨탑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의 말씀을 보면, 어쩌면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그 시대, 또는 그가 살던 그곳은 수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던 다신주의가 창궐하던 그러한 때 였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길이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상숭배와 다신주의가 창궐한 그 때에도 아브람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참된 주인되신 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분명한 사람이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전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하던 방법으로 못하던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 인생의 전환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늘 상 신기롭고 경이로운 것은, 내가 하나님을 찾았던 시간보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운명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친히 그가 우리를 찾아 오신다는 사실이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지 않고 순종한 절대적 순종의 태도가 우리를 책망한다.

그는 자기가 너무 늙었다고 젊은 사람을 가리키며 자신이 적당한 사람이 아니라고도 변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미 충분히 늙었기 때문에 이제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너무나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는 정착하고 노후를 안정되게 누려야 한다고도 항변하지 않는다.



창 12:4 절에 보니,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다" 고 말한다.

하나님의 왕국에는 " 은퇴" 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요즘처럼 조기 은퇴를 강조하고 사실은 수 많은 사람들이 옛날이면 한참 일할 나이의 때 은퇴를 해야 하는 요즘의 시대적 상황에서 보면, 아브람의 삶은 그야 말로 역발상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한가지 아브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때는 항상 그 분은 자신의 목적을 갖고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이다.

그 분의 부르심의 목적은 항상 우리가 갖고 있었던 우리 인생의 성취 목표보다 항상 더 크고, 그리고 더 절대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순종의 댓가는 항상 " Good Surprise " 이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더 크고 기이한 계획을 청사진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하고 항상 크시다.

창 11장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름을 창대케 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마음의 숨은 뜻을 보시고 언어를 혼잡케 함으로 그들의 이름은 어느 누구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아브람은 하나님의 계획처럼 "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v2..

그의 이름은 중동근바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아니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이름은 너무나 유명한 이름이니 말이다.

참으로 아니러니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천국은 " 높아지고자 하는 자를 낮추시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를 높이시는 " 역발상을 갖고 계신것 같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리를 강망하지 않는다.

높은 자리를 갈망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아브람의 삶의 본은 우리를 책망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하시는 역발상적 일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우리는 또 한가지 아브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보호하거나 지키려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그 분이 친히 그를 지키신다는 점이다. (..창 12:3)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높이거나 또 우리를 보호할 아무런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깃발이 되시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10월부터 진행되는 Silver missionary Training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아브람을 묵상해 본다.

70이 가까운 나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선교의 한 현장에서 그 분을 섬기겠다고 고국을 떠나는 이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아브람을 통해서 목소리를 듣는다.



아 ! 우리의 인생에는 너무 늦은 때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거나 삶의 목표가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이야 말로 그 일을 위해 시작할 가장 좋은 때 일 것이다.

아브람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는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늦은 때는 없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가 ?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새로운 생의 비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비전을 가슴에 품게 될 때 사람들은 변화를 시도하게 하고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곳을 향한 미래를 향한 강한 열망이 현재에서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한 강한 열망을 불태우게 하기 때문이다.

몇년전 스튜어트 에이버리 골드가 지은 핑" 이라는 책을 기억한다.

책의 주인공 개구리 핑은 험한 철썩강을 건너 그토록 갈망했던 황제의 연못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곳의 통치자 두꺼비와 연못 주민들은 자신들의 작은 연못이 세상에서 가장 넓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핑은 연못 주민들에게 더 큰 세상이 있다고, 함께 위대한 바다를 만나러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핑의 제안에 오직 젊은 개구리 두 마리, 다이콘과 호도만이 따라나서고 핑은 부엉이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멘토가 되어 광대한 바다로의 모험을 다시 시작한다.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단념할 줄도 아는 것이 성숙하며 어른스러운 것이며 그것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는 이들에게 핑은 이야기한다. "가능성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유일한 진짜 장애물은 항상 자기 자신입니다. " "인생에 있어 무언가 되기 위해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우리 삶의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노년의 나이에 불쑥 찾아온 하나님의 방문을 아브람은 아무 두려움 없이 받아 들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당신은 당신 가슴안에 무엇인가 되기를 갈망하는 강렬한 열망이 있는가? 부지중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방문을, 그 분의 음성을 듣기를 갈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무엇인가를 시작하기에 너누나 늦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2010년 9월 5일 일요일

요나단의 언약! (Covenant between Jonathan and David)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 가운데 신뢰를 찾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고 한탄을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도 사랑과 존경이라는 신뢰가 있을 때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관계에서는 정조를 지키는 것으로서 표현되어 질 수 있는 신뢰가 있습니다.

친구 사이에서도 서로의 신의를 지키는 흔히들 " 의리" 라고 불리우는 신뢰를 표혀해 주는 단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같이 신뢰를 찾아 보기 힘든 시류 속에서 목숨을 걸고 서로의 신의를 지키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우리를 감동 시키게 되어지고 그 감동의 이야기가 살아 있을때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소망이 있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타나는 많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을 말하여 주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그 장면들 가운데 늘 저의 마음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약관의 소년들이었던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 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한 사랑의 이야기 이고 그리고 우정의 이야기 입니다.



첫번째로,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는 흔히 말하는 신분을 초월한 우정의 이야기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천한 목동이었습니다. 다윗의 가족은 양을 치면서 사는 평범한 목자의 집안 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중에서도 가장 어린 막내였고 아버지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을 만큼 그는 아주 평범한 소년 이었습니다.

반면에 요나단은 왕자의 신분 이었습니다. 그것도 살아 있는 권력을 가진 사울왕의 왕권을 이어 받을 적통 왕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이스라엘의 왕위를 물려 받을 약속되어진 미래의 권력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소년의 사랑과 우정은 여인의 사랑보다 승한 깨어지지 않는 우정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두번째로,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는 시간을 초월하여 지속되는 영속적인 우정이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사울왕이 죽고, 요나단도 죽음을 맞이 합니다. 고대 근동의 풍속 대로 라면 언약은 언약을 맺은 상대편의 한 사람이 죽을때까지 존 속 됩니다. 언약의 대상의 어느 한 쪽이 죽게 되어 질때, 그 언약으로부터의 의무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가 왕이 되었을 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그를 보호하고 그글 자신의 왕자의 하나처럼 대하며 자신이 요나단에게 맺은 그 언약을 지켜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우정의 사랑은 시공을 초월한 영속적인 사랑이고 우정임을 보여 줍니다.



세번째로,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언약을 구속적인 관점에서 보여주는 아주 생생한 예표로서의 교훈을 우리에게 전달 해 줍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도들과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승화시키고 영화롭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하기는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들을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 하고 축복합니다.



본문은 사무엘상 18:1-5 로 돌아 갑니다.



"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 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읏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 하였더라,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우리는 왜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저는 요나단이 단순히 어린 다윗이 블레셋의 군대장이었던 골리앗을 죽였던 영웅적인 전투의 소식을 듣고 그의 탁월한 능력때문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은 다윗 못지 않은 놀라운 전투의 승리를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요나단과 병기든 두 소년이 불레셋 군대를 물리치는 사건을 통해서 이미 요나단은 다윗 못지 않은 용기와 담력과 그리고 리더십을 지니고 있었던 탁월한 사람이었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골리앗과의 싸움은 많이 이야기 하지만 요나단과 병기든 소년이 어떻게 블레셋 군대를 물리쳤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의아할 정도입니다.

사실 요나단의 불세출의 영웅적인 승리의 사건은 다윗의 등장 이전에 이루어졌던 것을 통해서 요나단은 다윗처럼 출중한 영웅이었음을 충분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4: 1-23).

아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 입니까? 하나님은 어른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소년들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을 봅니다.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루어야 하는 고대 전쟁사에서 요나단과 다윗이라는 소년을 등극 시키시는 것입니다.



1. 요나단과 다윗은 한 마음으로 연합합니다.



저의 추측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18장 1절에 있는 한 단어를 통해서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의 단서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1절에 보니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Jonathan became one in Spirit with David ..."

이 두 소년이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그 마음은 무엇일까요?

저는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마음 이었던 것이라고 믿습니다.

14장으로 돌아가십시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군대가 불레셋 사람과의 전투에서 불리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나단의 마음을 불붙게 하는 동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장면이 6절을 통해서 나타 납니다.

" 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노라..."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제 눈에서 흐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죽음의 공포앞에 떨며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고 있을 때, 어린 소년이었던 그리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요나단의 병기든자 두 소년의 마음이 의기 투합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위대한 믿음의 결단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전능한 하나님 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요나단의 고백은 무엇인가 닮은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요나단의 고백은 마치 쌍둥이가 같은 고백을 하는 것처럼 다윗이 골리앗을 싸울때의 다윗의 고백과 동일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었을뿐만 아니라 어쩌면 어린 요나단이 어떻게 병기든 소년과 함께 블레셋 군대를 쳐서 승리하였는지를 들었을 것이고 요나단의 무용담은 아마도 어린 다윗에게 믿음의 상승 작용을 하였으리라 저는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45-47절의 고백은 어쩌면 요나단이 불레셋 군대와 싸울때 고백하였던 요나단 고백의 다윗버전(David's Versio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절에서 그들이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그 근거는 그 소년들이 유일한 마음의 고민과 관심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일일까요?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 그 마음이 하나가 되어 여호와 앞에 한 마음으로 나아올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 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하리라 저는 믿습니다.



2. 요나단은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습니다.



3.절에 그들은 한 마음으로 연합하였을 뿐 아니라 마치 여인이 사랑에 빠진것처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은 마치 남자가 여인을 사랑하는 그 동일한 단어, 헤세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신약적 의미로는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사용하신 아가파오" 즉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둘은 언약을 맺는다고 말 합니다.

여기에서 언약이라는 단어는 "베리트" 라는 단어 입니다. 그 때 당시 고대 근동의 언약의식은 짐승을 잡아 그 짐승을 칼로 반으로 가릅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는두 당사자가 갈라진 짐승 사이로 걷습니다.

그 이야기는 만약에 언약을 어길시는 그 짐승과 같이 하나님께서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하게 된다라는 것을 동의 하는 것입니다.

베리트" 라는 단어 자체가 Cut it off" 가르다 잘라내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은 이러한 언약의식을 거행 했으리라 믿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은 18장 뿐만 아니라 20장에 다시 한번 등장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상 20:16-17 절에 그 소년은 다시 들판으로 나아가 두 사람 사이에 서로를 향한 사랑의 언약을 맺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워 이들은 생명을 걸고 서로를 지키고 축복하는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살아 있는 동안 다뒷을 생명을 위협하는 어떤 이들도 요나단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살아 있는 동안 요나단을 위협하는 어떤 이들도 이제 부터는 다윗의 원수가 되는 것 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과 요나단의 가문 사이에 이들은 서로를 보호하고 축복하는 관계가 가문에 까지 이어지는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 때 맺는 언약이 두 가문 가운데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역사를 통해서 바라보게 될 때 전율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무엘하 9장에서 다윗이 요나단 사후 본인이 왕이 되었을 때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요나단 가문 가운데 남은 자를 찾는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삼하 9:1 절에 보니 "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므비보셋을 찾아 그를 예루살렘 다윗의 왕궁에 머물게 하고 그를 왕자의 하나처럼 다윗의 식탁에 함께 하게 하는 놀라운 이야기는 다윗이 어떻게 요나단과의 맺은 언약을 지키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실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을 맺을때는 다윗이 요나단을 위하야 해 줄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요나단은 이 언약을 지키려 할때 그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했습니다.

첫번째로 그는 자신의 왕위를 포기하는 위험을 감수 합니다. 아버지 사울이 아들 요나단을 " 천한 계집의 아들" 이라고 비하하면서까지 다윗을 보호하는 아들 요나단의 행위를 비하하는 모습은 다윗의 존재가 얼마나 사울에게, 그리고 그 아들 요나단에게 위협적인 존재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다윗을 아버지에게로 부터 보호합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창을 던져 죽일려고 했을 정도로 다윗은 사울의 가문에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아들을 죽이려 까지 하면서 자신의 가문을 지키려 했던 사울에게는 아들 요나단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인자하심 때문 이었습니다.

긍휼, 여호와의 사랑, 희생의 사랑, 이것은 아가페의 사랑, 즉 구약의 헤세드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하 9:1 절에서도 다윗은 여호와의 인자를 이야기 합니다. "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에게 여호와의 은총을 베풀리라 " 여기서 은총도 동일한 여호와의 인자, 헤세드의 사랑인 것입니다.



아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입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부르실때 하나님은 여호와의 인자 헤세드의 사랑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비밀을 정확히 바라 보았습니다. " 에베소서 2:8 절에서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여기서 은혜는 여호와의 인자를 말씀 하십니다.

다위과 요나단이 서로를 향하여 가졌던 헤세드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다윗의 사후 솔로몬 시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던 초기에는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으로 통치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은총을 베풀어 지혜와 명예와 부귀를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후에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방여인들과의 통혼에 대한 규례를 어기고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후궁으로 그리고 첩으로 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둘로 나누십니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으십시다.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오직 유다 지파와 그리고 그를 배반하지 않고 남은 베냐민 지파만이 유다에 속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로보암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10지파가 함께 한 이스라엘 왕국을 건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르호보암은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이 남아 유다 왕국을 지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왕상 12:21-23).

참으로 놀라운 것은 사울, 즉 요나단이 속하였던 베냐민 지파는 다윗의 왕국인 유다 왕국에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맺은 언약이 다음 세대를 통해서 이어지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보면서 얼마나 전율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아 ! 다윗과 요나단이 함께 맺은 언약이 세대를 지나면서까지 여전히 하나님의 헤세드 안에서 굳게 맺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신약의 말씀을 읽으면서 다윗과 요나단이 맺은 언약이 여전히 유효 하게 성취되었는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를 소개할 때 그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씀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교회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되었을 때 수많은 이스라엘 지파들이 예수님의 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 들중에는 초기에 교회를 열렬히 핍박하던 한 청년이 있었던 것을 발견합니다.

그가 얼마나 교회에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는 이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한 뒤에도 아무도 그를 교회 가운데로 받아 들이려 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굳이 이 청년 사울을 택하시고 그를 부르셨을 까요.....?

저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빌립보서 3:5 절에서 자신의 가문을 소개하고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한번 전율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어지기까지 하며 수많은 고난과 박해와 죽음의 위협을 무릎쓰고 예수그리스도의 강력한 변증자가 된 사도 바울이 바로 요나단의 후손인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아 ! 이것이 헤세드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요나단이 다윗에게 여호와의 헤세드를 통하여 사랑을 베풀고, 다윗이 헤세드의 사랑으로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고, 모든 이스라엘의 10지파가 다윗의 왕국을 배반하였을때 베냐민 지파만이 남아 다윗의 왕국을 지키었던 것처럼,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헤세드의 사랑으로 베냐민지파, 즉 요나단의 후손인 사울을 전적으로 환상 가운데 불러서 그를 자신을 이방의 왕들과 권세자들에게 선포하고 변호하는 자로 삼으시고 요나단의 후손인 바울은 죽음같은 사랑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추종자,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총의 역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요나단이 언약을 맺을 때 본인에게는 한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인자를 베풀어 언약을 맺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다윗과 요나단과 맺었던 이 언약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백성인 우리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의 완성을 이루는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3,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와 맺은 언약을 보여 주는 놀라운 상징입니다.



성경에 언약(베리트, Covenant)이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맺은 장면입니다.

창 15:1-21 특별히 18 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을 때의 의식을 통하여 우리는 언약의 원형을 보게 됩니다.

즉 짐승을 쪼개어 놓을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불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갑니다.(17절)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그 쪼갠 사이를 지나갔지, 아브람은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람의 생애,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아들 ,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에 이르기까지 언약을 어기는 것은 늘 아브람의 후손들 우리들 쪽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언약의 모양을 바꾸시면서 까지 끝까지 자신이 세운 그 언약을 지키시는 인내의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멸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구원 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의 인자 때문 인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과 영원한 언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깨어지지 않는 영원한 언약 입니다.

히브시 기자는 히브리서 8장을 통하여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보여 주셨던 옛 언약은 장차 올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영원한 언약을 예표하는 그림자였다고 말합니다.

히 9:12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은 없어질 언약이 아니라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히8:13)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유월절 예식을 지키시며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나누시면서 이 언약식을 맺으십니다. (막 14:22-26)

" 떡을 떼며 축하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는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4)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 언약은 장차 다시 변형되어질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친히 그 언약을 보증할 쪼개진 짐슴의 몸으로, 또 피가 되신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 얼마나 놀라운 언약 입니까?



이것은 마치 요나단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 다윗이 아무것도 요나단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헤세드, 즉 여호와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맺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의 인자, 헤세드의 사랑으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아 ! 놀라운 그림입니다. 요나단이 자신의 왕자의 자리, 그리고 더 나아가 왕의 보좌를 다윗을 위하여 버렸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모든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친히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고 말씀 하십니다. 요한복음 1:14, 빌립보서 2:5-12)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언약을 맺으실때, 여러분이 그 분을 위하여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시고 그 분 자신이 친히 쪼개신 짐슴사이로 지나가셨던 하나님처럼, 그분이 친히 영문밖으로 나아가서 그 분의 언약을 성취 하셨던 것입니다.





4. 다윗은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요나단의 모든 것을 받습니다.



다시 사무엘상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을때에 그가 갖고 있었던 모든것을 다윗에게 줍니다.

4절에 보니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겉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왕자의 신분은 그의 겉옷을 통하여 나타내어 집니다. 겉옷은 신분인 동시에 그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진 것은 자신의 신분을 내어 던지는 것과 같은 심각한 행동이고 의식 인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보좌를 버리셨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실때 그 분의 겉옷은 벗겨졌고 찟져졌던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이를때에 의의 세마포를 입게 하신다고 말씀 하십니다.

다윗은 목동에서 왕자와 같은 신분으로 사람들의 존귀를 얻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옷을 입고 다닐때 사람들은 다윗이 요나단에게 중요한 사람, 즉 그와 같은 동일한 존귀함을 사람들에게서 얻게 될 것입니다.

4절에 성경은 또 요나단이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 띠도 그리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띠는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남자가 띠(벨트, belt)를 찬다는 것은 그가 사용하는 모든 군장들을 달고 거닐게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물품입니다. 띠에 그는 칼을 차게 됩니다. 띠에 활을 매답니다.

즉 그것은 그사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힘, 권능을 상징하는 표지 인 것입니다.

즉 요나단의 모든 권한을 다윗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니 사람들이 다윗을 다른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존귀한 자로 인정하기 시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의 비밀을 우리가 알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자 인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눈으로 우리를 인정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띠를 우리의 허리에 두르고 걷기 시작할때 다윗의 삶은 놀라운 변화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6장 14절에서 진리의 띠라고 말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 하나님의 권세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주님의 권세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네 그분의 말씀에서 입니다. 우리가 요나단의 띠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우리에게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검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권세 입니다. 말씀은 권능입니다.

이것이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속에 감춰진 비밀 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와 언약을 맺는 자들에게 감춰진 언약의 비밀인 것입니다.



사도행정 1:8절 주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이 띠로 무장할때까지 나가지 말것을 말씀 하십니다.

언약의 비밀을 이해할때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 위로부터 오는 권능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동행전은 우리에게 놀라운 비밀을 보여 줍니다.

즉 언약의 성취가 어떻게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에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처럼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할때 귀신이 굴복하고 병든자가 고침을 받고 앉은 뱅이가 일어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 !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언약을 맺었다면 우리는 그분의 전적인 보호하심, 그리고 권능 그 모든것을 우리가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당신은 주님과 함께 이 거룩한 언약에 참여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헤세드의 사랑을 인하여 당신에게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언약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축원 합니다.

2010년 9월 3일 금요일

태도 ! 당신을 변화 시키는 능력입니다. (리더십 2)

성경의 가장 중요한 중심 단어는 구속( Redemption, Salvation) 이다.

그리스도 전 생애의 가장 즁요한 사역을 한 마디로 정의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구속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속하신 구원의 증거, 그리고 구원의 실천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변화( Transformation) 일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롬 12:2 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변화를 받을 것을 촉구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 변화를 받아, 영어 성경에서는 " Be Transformed"(NIV)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 되어지는 것은 구원받기전과 구원받은 후의 삶에 변화 즉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쉬운 말로 말하면 당신이 주님을 믿은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이 달라진것이 교회를 나가고 있다는 것 외에 다른 어떤것을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리더십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크리스천 리더십과 세속적인 리더십의 차이가 무엇일까?

그것은 변화의 리더십 이라는 것이다.

Transformed Leadership "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변화를 받은 리더십이 되는 것은 우리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의 소명을 받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생각을 바꾸라" 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본다.

마음, 생각, 영어로는 Way of thinking, Conception, Perspective, Mind, 등 여러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데 결론적인 것은 우리의 삶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크리스천 리더십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 목적을 깨다는 것과 더불어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비전은 믿음의 선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을때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과 목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Revealation ! 즉 이것을 우리는 소명 또는 비전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일을 시키실때, 그 사람의 생각의 틀을 바꾸시고 난 후 부터 그 일을 시작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세상에서의 관점은 리더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이 있는가 ? 하는 것이다.

능력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Power 로도 번역할 수도 있지만 다른 단어 즉 Ability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리더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What are you able to do? 리더를 향한 세상의 요구인 셈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사람을 쓰실 때 그 사람의 능력(Ability)이 아니고 그 사람의 태도 (Attitude) 를 요구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십의 중요한 원리는 태도 ! 나를 변화 시키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리더십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발견 되어지는 공통적인 발견은 리더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Uniqueness ! 즉 리더는 그들의 추종자 Follower 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추종자들과는 다르게 생각한다.

즉 생각의 차이가 리더를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출애굽에서 가나안에 보내졌던 12명의 스파이들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가나안땅을 그들에게 약속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지식, 정보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약속은 모든 이들에게 공개되어졌고 주어진 약속인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을때 그들의 보고는 정말로 극과 극의 상반된 보고를 가져온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0명 즉 다수를 점유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가 극명하게 달랐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What make them to be different from others?



해답은 생각의 차이다. (Thinking make them to be different from others.)



그들의 생각은 극명하게 다른 보고서를 쓸 수 있었고, 그들의 긍정적인 생각은 그들의 태도를 다르게 만들었고 그들의 태도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나를 극명하게 다르게 만드는 생각과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오직 두가지 동물을 하나님의 속성과 동일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독수리이고 또 하나는 사자이다.

잘알고 있는 것처럼 독수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하늘의 왕이고 사자는 정글을 지배하는 왕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자는 리더의 정신을 갖고 있다. (Spirit of leadership)

바로 그 정신이 사자의 태도를 결정짓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리더는 다른 사람들 즉 추종자들과의 차이를 만드는 특별한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사자를 생각해 볼때 우리는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사자는 정글에서 가장 키가큰 즉 덩치가 큰 동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2) 사자는 가장 무거운 그리고 육중한 동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하마나 코끼에 비하면 사자는 게임이 안될 정도록 작은 편에 속한다.



3) 사자는 가장 지혜롭지도 않은 동물이다. 지능이 코끼리나, 원숭이, 그리고 뱀에 비해서도 딸리는 동물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자는 밀림의 지배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자를 밀림의 왕으로 지배자로 만드는 것일까.....?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 사자가 이끄는 양의 군대는 양이 이끄는 사자의 군대를 항상 이긴다."

즉 지도자는 평범하고 겁이많은 사람들을 최강의 군대로 만드는 힘과 영향력이 있는 것이다.

사자는 다른 동물들이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태도인 것이다. 사자는 먹이를 사냥할때 결코 동요함이 없다.

조용하게 아무런 두려움 없이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태도앞에 모든 동물들이 질려 버리게 되고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거대한 코끼리가, 사자보다 띄어난 지혜를 가졌고, 더큰 힘을 가졌고, 더 융즁한 덩치를 가졌음에도 토끼리는 제대로 대항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무엇이 이런 비극을 만드는 것일까? 바로 그것은 생각의 차이요 그 생각의 차이가 그들의 태도를 결정짓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자신, 자아관, 자존감에 의거해 행동을 하게 된다.

자신을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왕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고, 자신을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락없이 실패를 만들어 내고 만다.

사람의 행동은 생각의 열매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을 바꿀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모세, 기드온, 성경의 수많은 리더들을 만날때 하나님은 이들을 소명의 장으로 그들을 이끌때 마다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작업부터 하신 것을 보신다.

어린아이라고 부정적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에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어린아리라 부르지 말라고 말씀 하신다.

두려움가운데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 하신다. 내가 모세에게 함께 했던 것처럼 똑 같이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에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생각과 시선을 하나님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으로 바꾸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는가?



1. 태도는 믿음의 결과물 입니다. ( Attitude is a product of your belief)



모세가 자신을 리더로 이스라엘의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은 모세의 전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그 소명의식은 당연히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이었다.

그와 함께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너무나도 분명한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모세는 모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체계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자는 밀림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자 스스로가 밀림의 왕이라고 믿는 그의 강력한 태도때문 인 것이다.

사자는 그의 체격, 지능,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향하여 믿는 그 신념아래서 그의 밀림의 지배자로서의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능력은 우리의 내면안에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믿는 그 믿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으로부터 변화를 꿈꾸고 있다면 먼저 우리는 나 자신의 믿음의 체계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 나는 나 (I am that I am !) 라고 말씀 하신다.

예수님도 7번 I am " 설교를 하셨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당신을 누구라고 하는가 ?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을 묵상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때 당신안에는 비로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여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생각의 산물이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그 이상의 나는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지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될때 우리는 비로서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되고 그리고 우리안에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나를 향한 나의 올바른 태도는 무엇일까?



1) 내가 생각하는 나 ? ( Your perception of who you are )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수 많은 만남을 갖게 된다. 특별히 우리는 자라면서 나를 양육하고 성장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삶의 지대한 삶의 영향을 미친 것을 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우리에게 준 지대한 영향의 지배아래서 자신데 대한 자존감, 그리고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번 종이를 꺼내어 놓고 자신에 대한 당신의 느낌을 적어보라...........

나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는가?

나난 나에 대하여 얼마큼 나를 신뢰하고 있는가 ?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대하여 지독하게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가 ?

나는 나에게 영향을 끼쳤던 그 누군가가 심어놓은 생각의 씨앗의 노예가 되어 그 한계안에 갖혀져 있지는 않는가?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냐 ? 제자들에게 물어 보셨던 예수님,

그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물어 보신 주님,

마찬가지로 우리는 동일한 질문 앞에 직면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할까?

나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우리는 우리에게 심겨진 거짓된 선언(Statement)들을 뽑아 내야 할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제안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변화를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안에 내면적 변화가 일어날때 우리의 행동은 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의 내면의 자아상이 바뀌기 시작할때 사람들을 향한 나의 영향력은 증대 되어 질 것이다.



2) 나의 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Why you think you Exist)



수많은 사람들이 공허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는 것처럼 살아 간다.

그들은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연명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자신의 분명한 삶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그 어떤 긍정적인 영향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왜 이땅에 존재해야 하는 지 그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시다.

바울에게는 분명한 삶의 이유가 있었다. 그의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였다. 즉 다른 말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이며 목적이었던 것이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들, 리더십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 그리고 수많은 개인들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에 대한 분명한 방향을 잃어 버렸기에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혼돈 스러운 것이다.

창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를 완성하셨을때, 이 땅에서 공허함과 혼돈이 물러갔다.

내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그 목적을 우리에게 말씀 하심을 들을때,그것을 발견할 때 우리 인생의 공허함과 혼돈은 물러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해 줄 수 있는 리더를 갈망하고 있다.

어떻게 가야 할지는 그들이 발견해도 될 것이다.



3) 당신의 소중함을 깨달으라 ( Your sense of Significance)



우리가 이 땅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나의 정체성에 대한 당신의 관점을 바꿔라.

우리가 왜 이땅에 존재해야 하는지를 알때 우리는 비로서 리더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리더십의 가장 명료한 정의 가운데 하나를 명심하라. 리더십은 어떤 직위가 아니라, 리더십은 영향력이라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될때, 즉 그들의 인생의 소명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들은 리더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소명의식이다.

나는 이 소명때문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어 지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다른 추종자로부터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원동력의 비밀인 것이다.

성경을 읽으라 ! 하나님은 수많은 그의 종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신다.

내가 너를 불러서 선택하였노라 ! 너는 내게 아주 특별한 존재이다.

이러한 소명의식이 우리 안에 싹트기 시작하고 자라나기 시작할때 우리는 서서히 우리안에 있는 지도력을 발견하며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지도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태도가 그 사람을 지도자로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그분의 일을 하시겠다고 말씀 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 하신다.

나는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사자가 밀림의 지배자라고 생각하는 그 태도가 그를 정글의 지배자로 만들었던 것처럼 당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선택된 소명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당신을 향한 당신의 태도를 결정할때 그때 비로서 당신안에 감춰저 있는 능력을 보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태도, 당신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바꿀때에 당신은 세상을 변화 시키는 능력있는 지도가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을 향하여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 ?

2010년 8월 31일 화요일

" I am Sorry ! " 를 잘하는 사람이.....

얼마전 누군가의 글에서 재미난 글을 읽었다.

" I am Sorry ! 를 잘하는 사람이 고액 연봉을 받는다" 는 글이었다.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I am sorry'라고 사과를 잘하는 사람일수록 소득이 높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조그비 인터내셔널은 최근 7천59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인터뷰 방식으로 조사한 결과, 연봉이 10만달러 이상인 고소득자가 연간 2만5천달러 이하의 소득층보다 2배 정도 사과를 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느꼈을 때 사과하느냐'는 질문에 연봉 10만달러 이상자 92%가 '그렇다'고 답변한 반면, 7만5천~10만달러 소득자는 89%, 5만~7만5천달러 소득자는 84%, 3만5천~5만달러 소득자는 72%, 2만5천~3만5천달러 소득자는 76%, 2만5천달러 이하 소득자는 52%만이 '그렇다'고 답변했다.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사과를 잘한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또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을 때도 사과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10만달러 이상 소득자 가운데 22%가 '그렇다'고 답변한 반면, 2만5천달러 이하 소득자는 13%만이 '그렇다'고 답변, 10만달러 이상 고소득자가 2만5천달러 이하 빈곤층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사과를 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펄아울렛의 테리 셰퍼드 사장은 "이번 조사의 결론은 많이 벌고 싶으면 '미안하다'고 말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로 재미난 통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이 글에서처럼 나는 고액 연봉을 받는 사람은 아니다. 가난한 선교사가 고액을 받을일은 만무하지만 내가 고액을 받느냐 안 받느냐를 떠나서 , 나는 내가 잘못한 일에서 조차도 " 미안하다" 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인색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무엇이 우리를 Sorry 에 인색한 사람을 만들까?



첫번째, 우리 자신은 자신이 늘 완벽한 존재라고 믿고 싶어한다.

내가 Sorry" 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완벽하지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나이를 먹어 갈수록 그 경직성은 더하여 간다.

더욱이 우리가 어느덧 작든 크든 리더라고 불리워지는 위치에 있을 때 내가 누군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꼴이 된다고 생각하니 더욱이 그 말이 어려움을 보게 된다.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나서 더더욱 그런 경향이 두드러 진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인데....내가 나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만큼 내가 영성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그럴때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존경을 잃어 버린다고 생각하는 불안함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참 얄굿은 자존감이다. "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을 수없이 외쳐 대지만 우리는 수도없이 내가 죽었다는 외침 속에서도 여전히 나를 지키고 싶은 얄굿은 자존감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죽엄음을 나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내가 실수하거나 잘못을 할때 즉각적으로 그 실수를 인정하고 I'm sorry, its my fault" 라고 말할 수 있을 때가 아닐까?



두번째, 우리가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는 것을 나 자신이 실패자로 인정한다고 생각하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상하게 " 성자 컴프렉스" 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성경이 우리를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씀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끊임없이 성숙을 향해 달음질하고 거룩함과 의에 이르기에 힘써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성경은 단 한번도 우리에게 실패가 실수가 없는 삶을 살라고 요구하신적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범죄( 실수, 실패)할때에 죄를 서로 구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말씀 하신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주님을 믿어도, 주님의 거룩한 성도가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실수를 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 Failure is an event, not a person" 실패는 하나의 사건이지 그것이 그 사람이 실패자이고 그리고 그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 내 마음에 합한 자" 라고 불리움을 받았던 우리가 흠모하는 다윗왕조차 얼마나 많은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는 삶을 살았는가...!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며 다윗에에는 우리에게 없는 하나의 심성이 있었는데 그것은 누군가가(특별히 나단은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것을 지적하엿을때 그것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즉각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는 즉 하나님깨 I'm sorry for what I did !" 라고 고백하는 순수함이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실수를 하고 어떤 한 일이 우리를 영원한 실패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더욱더 의의 거룩함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째찍질 같은 역할을 함을 바라볼 수 있을때 우리는 비로서 우리의 실패나 연약함에 대하여 정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완벽주의는 병이고 그리고 그것은 불 신앙인 것이다.

왜냐하면 완벽하지 않은 존재인 자신을 자꾸만 완벽한 하나님의 위치에 자기를 올려 놓으니 그것이 불신앙이요 또 그러지 못한 자신을 발견할때마다 그것을 포장하고 아닌척 위장하려니 얼마나 고통 스러울까...................?

나는 그 동안 그러한 삶을 내가 살아 왔음을 안다. 참으로 고단한 삶이다.

주님앞에 I am Sorry ! 라고 해 버리면 됬을것을 내가 아이들한테 잘 못을 할때 아빠가 실수했다 미안하구나 하면 됬을일을 그 놈의 자존심을 지키느라 버티느라 아빠로서의 체면을 더 구긴일이 얼마나 많은지 ?

당신은 실패를 받아 들이는가? 그것이 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성공을 향해 가는 하나의 징검다리임을 우리는 정말로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가?

실패를 자신의 인격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 들일때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 들일때 우리는 우리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세번째,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만큼 건강한 자존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옷을 입는데도 편안함이 있다. 케쥬얼한 옷을 입고도, 자동차 문에 흠집이 있어도 정말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거에 그렇게 개의치 않지만, 가난한 사람일 수도록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 더욱더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예민하리 만치 민감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몇년전 이곳 선교기관의 재단 이사장을 한국의 목사님과 만난 적이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만나는 첫 대면의 날인데 그 이사장은 픽업 트럭을 타고 작업복에 장화를 신고 모자를 쓰고 나타난 것이다.

한편으로는 무례하게도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은 사실은 뉴질랜드에서도 몇번째 안가는 백만장자의 대열에 있는 교회의 장로님이셨던 것이다.

함께 했던 목사님과 나 자신이 감동을 받았던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형식에 매이지 않는 그러한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일 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관대할 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도 관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 중의 더러는 너무도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들을 본다.

하나님이 나를 있는 모습 받으셨다는 성경의 진리는 하나의 지식에 불과하고 자신에게 하나님보다 더 엄격한 기준과 잣대를 적용하다 보니...결국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늘 못 마땅한 마음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당신은 " I am Sorry !" 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가 ?



연봉을 높이려면 오늘 부터 이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 미안 합니다. "

2010년 8월 30일 월요일

" 목사님, 빵조가리나 주네요........ 잼 하나 없네요 .....ㅎㅎㅎ!!

이곳에서의 4개월 훈련을 마치고 네덜란드의 컨퍼런스 센터에서 2주간의 오엠 오리엔테이션을 받는 선교사로 부터 짧은 메세지가 남겨졌다.

그래도 요즘은 참 좋은 세상이다. 이메일이고 그리고 짦은 페이스북을 통해 간간히 남겨지는 소통을 통해서 우리가 아직도 연결이 되고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내가 20년전에 오엠에 조인할때는 국제전화가 유일한 소통의 방법이고.....그리고 우편이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요즘처럼 통신의 혁명이 일어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어제는 급하게 아무 생각없이 댓글을 달아놓았는데.......

그 밑에 제자하나가 그 밑에 댓글을 달아 놓았다. 일종의 항의성 글인것 같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을때 가장 막내였던 빛나였기에.......경상도 아가씨의 특유의 어감이 나를 늘 미소짓게 만들곤 하였는데.....

벌써 일주일이 넘게 생활을 하면서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 빛나 선교사의 글이다.



" 목사님 ~여기 네덜란드 죙일 비와서 잼 없습니다,,
사실 백인들 겁나 많아서 적응도 잘 안되구요..ㅠㅠ계속 빵쪼가리 주고요
ICI가 천국이라고 또 말하게 되네요.ㅋㅋ
목사님 ~많이 보고싶어요~"



나는 그 밑에다 댓글을 달아 놓앗다.

" ㅎㅎㅎ 그 빵조가리에 고추장 발라 먹으면서 견뎌라......
토마토 소스라고 하면서 ㅎㅎㅎ"



사실 빛나 선교사의 짧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말하는 그 어감을 고스한히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20년전 처음으로 네달란드 De Bron Conference 센터에서 2주간의 수련회를 할때 나도 매일 나오는 서양식 음식에 매일 먹는 빵이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빛나의 그 말이 불현듯 나를 20년 전으로 데려다 놓은 것이었다.

긴 줄을 서면, 정말 전 세계에서 온 유럽의 선교사들이 줄을 서서 말을 걸고........

누군가 미소를 짓고 말을 거는게 왜 그렇게 부담스럽고 어려웠던지.......그래서 사람들이 다 먹고 나갈 무렵 일부러 늦게 식당으로 가서.....사람들이 많이 앉지 않은 구석진 자리를 찾아서 혼자서 ...그래도 같은 한국 선교사들을 만나면 안심을 하고 식사를 하던 그 시간들이 불현듯 떠 올랐던 것이다.

매일 먹는 빵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는데 누군가 꼬불쳐 놓은 고추창을 무슨 보물단지 모양으로 남이 볼세라 빵에다 발라 먹으면서 향수를 달래던 1989년 8월의 데브론 수련회를 나는 잊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속으로 밥먹을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밥먹을때만은 영어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혼자 구석진 곳을 찾아서 식사를 하던 생각이 난다.

빛나가 목사님 여기 백인들이 겁나게 많아서 적응도 안된다는 말이 나는 100% 감으로 느껴지는 이유이다.

세계 선교를 한국에서야 목이 터져라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한국의 젊은이들을 놀랍게 쓰실 것입니다" 라고 큰 소리 빵빵치고 천장이 떠나갈듯 통성소리를 해 댔던 우리지만...막상 정말 전세계의 사람들이 메이저 그룹으로 모여 있는 선교현장에 우리가 있을때 우리가 왜 이렇게 왜소해 보이고 그리고 소외감을 느끼는지........



빛나의 " 잼 하나 없어요 " 뒤에 숨겨 있는 일종의 두려움, 영어에 대한 컴플렉스, 매저리티 그룹이 아닌 마이너리티 그룹으로서의 한국인 선교사, 비영어권 선교사가 느끼는 가장 리얼한 느낌인 셈이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쓰시겠다 하셔도, 우리는 아직도 넘어야 할 많은 도전과 장애물이 있는 것이다.



한국인 선교사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것중 하나는 음식이다.

서양 음식이 태생적으로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만큼 우리가 웨스턴 푸드에 적증했다고 생각해도.....아무리 몇개의 빵조각을 집어 넣어도 밥과 찌게가 채워주는 포만감과 따뜻한 그 정서감은 빵으로 채울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기에.....

빵을 먹는 그 시간들이 우리에게는 배고픔과 허기짐을 느끼게 만든다.

그것은 양의 포만감이 아니라, 우리가 익숙해 있는 엄마의 손길, 고국의 손길, 내가 고국을 떠 나 있다는 외로움의 공백인 것이리라 믿는다.



두번째로 한국인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어려움이다. 현지에서 쓰는 어려움이 아니라, 선교를 주도해온 서구 선교사들의 그 주도권, 그리고 그 역할이 영어를 얼마나 하느냐 하는것에 달려있는 국제선교의 현실 앞에서 이제 막 선교를 시작하는 우리의 젊은이들에게는 우리를 주눅들게 만드는 두려움이고 불편함중의 하나인 것이다.



세번째로, 개인주의 가족주의의 차이에서 오는 정서적 갭이 그것이다.

아무리 좋은 서양 선교사들을 우리가 친구로 가져도 마치 친형제 처럼 자매처럼 보살피고 느끼는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늘 우리라는 정서적 공감대속에서 둥지를 틀고 살아야 하는 우리 한국 선교사들에게는 이러한 시간이 호락호락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아닌 것임을 나의 경험을 통해서 생각해 본다.

" 잼 하나 없어요........ 그 하나의 말이......웃음뒤에 짠한 애잔함이 내 가슴속에 뭉클하고 솟구치는 것은 어린, 아니 나의 후배 선교사들이 걸어야 할 그리고 그들이 시작해야할 선교사로서의 여행의 시작의 서두임을 알기에..................

내 미소 뒤에 그들을 향한 나의 동지애적, 그리고 선배로서의 동질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누군가 눈물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고서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던가 ? " 그런데 나는 누군가 고추장을 바른 빵을 먹어보지 않고서는 선교를 논하지 말라" 고 말하고 싶다.

나와 다름을 경험하는 첫 시간, 나의 익숙한 곳으로부터 떠나는 떠남의 시작, 그 여정의 서두에서 어린 빛나가 남긴 짧은 메세지 속에 묻어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빛나야 !!!! 고추장 바른 빵도 먹을만 하단다.

한국 선교사는 그 뜨거운 고추장처럼 뜨거운 주님을 향한 열정이 있기에 우리에게 넘어야 할 많은 도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란다.

네가 고추장을 딸기잼이라고 웃으면서 서양 선교사들에게 웃으면서 건넬 수 있을때 너는 긴 국제선교 속에서의 한국 선교사로사의 첫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란다.



" 빵조가리를 잘 먹을 수 있는것 ...... 그것이 선교의 시작이란다.

겁나게 많은 서양 선교사들 속에서 그 빵조가리를 먹어 주면서 그들을 섬기고 나중에는 리더해야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 세대에 한국 선교사들에 주신 사명이라면 그 빵조가리도 감사하면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빛나야.............그 빵조가리.......나도 그렇게 먹어 봤단다.

고추장 발라서 먹은 빵조가리의 맛 그 맛이 어땧는지 다음에 애기해 보자꾸나 ㅎㅎㅎㅎ "

2010년 8월 29일 일요일

왜 우리는 사람을 양성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사람을 세워야 하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홀로 두시기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누구나 모두에게 자신들이 존경하고 그리고 자기가 닮고자 하는 영웅(Hero)이 있다.

내가 누구를 존경하는가? 는 리더십 계발의 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 한다.
사람들은 역사속에서, 그리고 책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성취한 사람들을 존경하게 된다. 그들중 많은 사람들은 본인의 탁월한 능력을 통하여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이루어낸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다음의 누구를 존경하는가?

 샘 월튼(월 마트 창업자)-
 빌 게이츠 같은 혁명적인 사업가?
 베에토벤 같은 불운의 위대한 음악가?
 마이클 조던이나 타이거 우즈 같은 유명선수 ?

 마를린 먼로나 톰 크루즈 같은 유명 연예인 ?

 알렉산더 대왕이나 징기스칸 같은 위대한 정복자?

 마이 퀴리, 토마스 에디슨, 아인슈타인 같은 혁명적인 과학자?

 윌리암 케리나 마더 테레사 같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사람들 ?

어쩌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역할대상으로 삼고 그들의 삶의 궤적을 닮기를 원하며 삶을 연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가 존경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일의 영역에서 최고의 경지에서 오르거나 무엇인가를 성취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미국인들은 개척가나, 불세출의 비스니스맨들을 좋아한다.

< 우리들 안에 숨어있는 람보 신드롬>

우리는 미디어가 투여한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속에 가만히 들어와 자리잡고 있는 한가지 공통적인 생각은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도 위대한 일을 성취한, 그리고 성취해 가는 람보나 외로운 방랑자 (lone Ranger) 와 같은 모습을 닮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역사 어디에서도 그리고 성경의 어떤 곳에서도 한 사람이 어떠한 위대한 일을 이루어 낸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혼자 적군을 섬멸하는 람보 같은 인물은 실재의 인물이 아니다. 더욱이 기독교 리더십의 경우 더더욱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원리의 비밀을 의식하고 깨닫는 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는 창조의 역사 가운데, 삼위의 하나님이 함께 일하셨음을 말씀 하신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나 설명을 미룬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의 성품과 속성을 통하여 함께 하는 함께 일하는 팀웍의 모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어떤 의미 있는 위대한 업적이나 성과도 한 사람의 개인적인 능력만으로 이루어진 적은 없다.

우리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아담을 잠재우시고 하와, 또는 이브를 만드시는 장면을 결혼의 의미에만 국한 시키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아담이 하나님이 지은 창조의 대 서막뒤에 이름을 짓는 일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린다. 그런데 그 일을 이룬후에 하나님은 아담을 잠재우신 후에 그를 돕는 베필을 만드신다.
여기서 돕는 베필이라는 에세르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 전반에 나타나는 중요한 개념이다. 단순히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돕는 베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케어하고 구하는 일, 친구를 돕는 일 이웃을 돕는 일에서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이 돕는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리더에게 사람을 양성 하도록 부르셨다>

중국의 격언에 “ 유능한 사람 뒤에는 유능한 다른 사람들이 있다” 라는 말이 있다.
즉 그 이야기는 위대한 일을 이룬 사람들 뒤에는 항상 그들과 함께 했던 유능한 다수의 사람들이 늘 함께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와를 붙이셨고,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과 여호수아를 붙이셨고, 기드온에게는 300용사를 붙이셨고, 다윗에게는 3명의 다윗의 용사들과 수백명이 넘는 다윗의 사람들을 붙이셨고,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을 통하여 아버지의 꿈과 비전을 이루어 갔던 점을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바울에게는 바나바를 그리고 후에 디모데와 실라와 그리고 루디아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다수의 사람들을 붙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이루어 갔음을 볼 수 있다.
성공적인 기독교 지도자의 생명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정검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나 스스로 혼자 이룰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다른 사람과 함께 할 때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에 있다.

하나님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이루기를 내가 열망한다면 재빨리 돕는 자들, 그리고 함께 일할 자들을 구하는 기도를 하며, 자신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일할 수 있는 자로 리더 자신의 생각의 유형과 성격, 그리고 소통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계발하는 일을 통하여서 혼자 스스로 누구의 도움없이도 일을 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서부터 깨어 나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 리더들에게 주신 절대절명의 사명은 사람을 양성하는데에 있다. 모세는 평생을 통하여 여호수아라는 젊은 믿음의 용사를 지도자로 양성하는 일을 통하여 그에게 맡기신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일을 감당하였다.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 전 생애를 통하여 12명 더 깊이 나아가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라는 제자를 길러냄으로써 아버지가 그에게 맡기신 세상을 구속하는 구속의 사역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7명의 신실한 일군들을 양성하고 길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게 하였고 사도바울은 그가 교회를 세우고 가는 곳곳마다 말씀으로 그들을 양육하고 육성함으로써 장로들을 세우는 일을 통하여 지도자만들기의 모형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만일 당신이 혼자 당신의 교회에서 선교지에서 또는 온갖 유형의 사역의 현장에서 당신이 없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면서 불평을 하며 그리고 내가 얼마나 위대하게 이 일들을 수행하고 있음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다면, 당신은 아마도 하나님이 그대에게 맡긴 가장 주용한 소명을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지도자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람을 양성하시도록 부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그 일을 하고 있느냐? 를 더 관심을 갖고 계시는 영역이다.

당신은 지금 사람에 집중하고 있는가?

2010년 8월 26일 목요일

예수님의 리더십

요즘 리더십에 관한 정보들이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다.

101가지의 리더를 만드는 매직같은 원리를 알려주는 지침도 있고.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법칙처럼 리더를 만들어 주는 정말 신통한 법칙을 말하는 책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최근 특별히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기독교 리더십에서 우리는 다양한 이론과 접근을 우리가 볼 수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리더십의 모델을 보여 주시는 분은 다름아닌 예수님이신 것이다.



오늘 오전 리더십과목을 수강하는 우리 학생들과 리더십의 여정,발전" 에 대한 것을 공부하는 가운데 공동묘지를 아침에 방문하였다.

사실 과목의 과제는 자신이 죽었을때의 비문과 나의 장례식에서 와서 참여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조문을 작성하는 것이 과제였다.

약 한시간 가량을 묘지를 다니면서 그들이 살았던 비문을 읽는 것은 실로 엄숙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태어난지 3일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80년, 때로는 39년, 19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왔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날때는 순서 없이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87년도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오엠에서 함께 섬겼던 루디의 묘를 찾아가 조의를 표하였다.

참으로 신실한 형제가 아닐 수 없었는데........

그는 정말 꽃 다운 나이에 일찍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묘비를 만지며 내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가 오늘 있을 수 있다면 하는 관절한 바램으로.......



그러면서 오늘 주님은 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하여 주었다.

마치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묘비를 보면서 알게 된것은

사람들은 참으로 제한된 시간의 범주안에서 살아 간다는 것이다.

때로는 90년, 80년 또 70년 가슴 아프지만 15, 30대의 나이로 정말로 아무런 순서없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산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제한된 시간의 범위를 안고 살아간다.



나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에게 나타난 가장 중요한 특성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첫번째, 예수님의 리더십은 제한된 시간에 대한 긴박하고 간절한 의식이 주님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1963년에 태어나서 1998년에 운명을 달리 한것처럼.....

우리 모두는 다 제한된 시간( The limitted Time of Frame)시간 안에 살 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신 일을 하는 삶" 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양식은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이것이니이다" 라고 말씀 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를 알고 계셧다.

그러기에 그 분의 삶의 하루 하루는 정말로 긴박하고 절박한 인식으로 점철 되어진 삶이었던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의사로 부터 이제 6개월밖에 더 살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면 당신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내가 믿기로는 이제 남은 6개월은 일분 일초가 너무나 소중하고 절박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가장 의미있고 전략적으로 사용하야야 하는 긴박함의 결정이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응집된 그 삶에서 나온 그 엄청난 힘의 근원은 바로 이 주어진 제한된 시간에 대한 주님의 절박한 인식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우리에게 만일 주님과 같은 이런 절박한 제한된 시간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삶은 분명한 목적을 성취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둘째, Awareness of purpose of Life.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가? 를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그 절박한 제한된 시간의 인식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즉 분명한 목적을 성취하는 삶을 살게 하셨다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당신은 당신의 삶의 목적을 아는가?

주님은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언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세째로, 주님의 또 다른 모습은 주님은 바로 집중된 선택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즉 Focus 집중인 것이다. 그리고 그 집중은 가치 Value를 선택하는 삶을 사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셨다. 그는 제한된 시간을 아셨고 그 제한된 시간속에서 사명(Purpose)을 이룰려면 정말 선별된 집중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성공한 많은 리더들의 모습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은 정말로 집중의 힘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세상에서도 성공하는 사람들은 이것 저것을 다재다능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가지 일을 집중하여 최고의 가치를 창출할때 더 많은 성공의 확률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을 구속하는 그 일을 위해서도 그분은 12명의 사람들에게 집중하였고 그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들, 개인인가를 인식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 그리고 내가 선택하여 집중된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키워야 할 것이다.



넷째로,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사역은 친구를 만드는 사역이었다.

에수님은 제자들의 최고의 스승이셨다. 스승인 예수님은 최고의 권위를 가지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시기전 유언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 이제는 내가 너희를 친구하 부르시겠다" 말씀 하신다.

아 얼마나 놀라운 통찰일까?

리더십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는 그들은 솔로 퍼포머 즉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해내는 만능" 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가 삶을 투자하고 그리고 훈련하였던 그 제자들을 자신의 친구라고 선포 하신다는 것이다.

리더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주변에 친구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Accountability Group이라 칭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연약함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품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나 어떤 재질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가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리더는 사역의 열매로 자신과 함께 삶을 나눌 수 있는 친구 공동체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 내가 너희를 나의 친구" 라 부르시겠다고 말씀 하신다.

당신은 예수님의 친구 입니까?

예수님이 당신을 의탁할 만큼, 당신은 예수님과 가까이 게십니까?

주님은 당신의 친구를 원하십시다.

2010년 8월 12일 목요일

" 여기 소가 있습니다. ....??

모든 선교사들이 열정을 갖고 사역지로 나아 간다. 때로는 사역지에서 겪을 충격과 그리고 자신이 지불해야 하는 배움의 값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짐작도 가늠하지도 못한체 처음 선교지로 나아가는 선교사에게는 그 가슴속에 부푼 꿈과 이상 그리고 당찬 야망(비록 선한 야망이라 해도 나중에 그것은 정말 허황되고 당차다 하겠다.)을 안고 선교지로 나아간다.



나도 예의는 아니었다. 국제선교단체에서 그 전년 까지만 해도 다른 사역지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받지도 않았고 사무실에서 조차도 바로 첫해에는 바로 터키로 들어갈 수 없다는 협박(?)을 들으면서 나는 내심으로는 그렇지만 하는 당찬 용기를 갖고 다른 필드를 거치지 않은 첫 케이스로 들어간다는 자부심마저 가진체 터키로 들어갔다.

국제팀이니 당연히 영어로 생활해야 하는 어려움 그래도 조인할때는 통역을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는 얄팍한 실력을 믿고 나는 잘 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었다.



언어학교에 등록을 하고 마치 입학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언어학교로 가는 날을 기다리며 부뿐 기대감으로 조바심을 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너무나 쉽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바로 내가 사는 싱글 숙소, 즉 우리가 세들어 사는 아파트 앞동에 대학을 다니는 청년이 있었고 얼마나 친근한지 그리고 조금 영어로도 소통이 되니 금상첨화였다.

그래서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기를 다짐하고 터키어를 배우는데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하였는데 순수히 오케이 였다.

그래서 생존을 위한 터키어 예습을 진행하였다. 언어학교에 가는 법, 버스 노선과 버스를 타고 내릴때 요령....

옛날 어린시절 승합차로 불렸던 조그만 미니버스가 마치 택시처럼 다니는 노선 어느 곳이든 손님이 내리고 싶은곳에 승하차를 할 수 있는 정말 자유 백배의 재미난 교통수단이었는데 터키어로 "돌무쉬" 라 불렀다.



앞집 청년은 친절하게도 종이에 써 주어가며 내가 내릴 곳 앞에서 운전 기사 아저씨에게 이렇게 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 브라다 이넥바~르 " 몇번을 연습을 하였으니 발음에도 자신감이 붙고 드디어 이제 나 혼자 버스를 타고 학교에 통학을 하는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 ..내가 동료 선교사가 안내해주어 오고 갔던 낮익은 지형지물들, 내심을 긴장을 하였지만 내가 점찍어 주었던 건물이 눈앞에 보이고 나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 쉬며 아주 여유로운 목소리로 운전기사를 향해 외쳤다.

"브라아 이넥바~르" 그런데 무슨 일인가? 순간 버스안에 있던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고 버스안에 있었던 아줌마들 그리고 터키 아가씨들이 싱긋이 나를 보고 웃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무엇이 잘 못 되었구나 하고 직감적으로 눈치를 챘다. 이미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빨개져 있었다.

첫 날 수업을 하는 내내 수업이 집중이 안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아무튼 허둥지둥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디크멘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올라타고 집으로 향했다. 우리 집 아파트로 가는 방향에 조그마한 슈퍼가 보이고....그래서 나는 다시 그러나 이번에는 얼버무리는 목소리로 다시 기사에게 외쳤다.



" 브라다 이넥 바~르 " 이번에도 버스에 있는 사람들의 미소,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집으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뒤 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도망치듯이 들어갔다.

뭐라 그럴까? 조롱을 당한 느낌, 그리고 창피함, 낭패감, 그리고 속에서는 화도 끓어 올랐다. 도대체 무엇인 잘 못된 것일까?

하지만 창피해서 누구에게도 물어볼수도 없었다. 적어도 대학을 졸업하는 선교 훈련을 받고 온 그리고 선택받은(?) 소수의 한 사람 이었던 나인데................

하지만 궁굼함을 떨칠수가 없었고 그리고 당장 내일이 문제였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멕시코에서 온 내 룸메이트인 선교사에게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내가 연습했다던 문장을 다시 읊조렸다. " 브라다 이넥 바~르" 한 단어 단어에 자신감이 없었다.

그러자 마자 내 룸메이트인 선교사가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설명을 하였다.

즉 터키 청년이 가르쳐준 문장에 단어 하나를 트위스트 한 것이었다.

즉 이네젝(Inneck) 이라는 동사가 영어에 Get off, 내리다 라는 말인데 정말 한끝 차이로 바뀌치기 한 단어 내가 그렇게 자신있게 외쳤던 Innek 이라는 말은 " 소" 라는 명사였던 것이다.

알파벳도 모르고 터키에 온 햇병아리인 내가 알턱이 없었다. 즉 나는 저 여기에서 내려요 " 라는 말 대신 " 여기에 소가 있습니다.

" 저는 소입니다" 라고 외쳤던 것이다. 멀쩡하게 생겨먹은 외국인이 그러고 너무나 자신있게 외쳐 댔으니 그들에겐 얼마나 재밌었을까?

아뿔싸.............!!!

하지만 이것은 내가 그 후로도 내가 범해야 했던 수 많은 실수들의 서곡에 불과한 것이었다.

유난히 완벽주의자 였던 그리고 소심하고 열등감이 많았던 내가.......부푼꿈을 안고 첫 선교사의 관문인 언어학교를 가는 날 보기좋게 망신살을 당했으니..............이 창피한 애기를 누구에게 할 수 있을까.............

이제는 아스라한 20여년전에 일이다.



되돌아 보니..........우리는 실수를 하는 것이 은혜다. 또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이 은혜임을 요즘 조금씩 깨 닫는다.

우리에게 실수가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내 삶에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존재를 인정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요즘 영어로 강의를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콩글리쉬를 한다.

이놈의 영어는 쉬운듯 하면서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이다.

이제 열살밖에 안되는 내 아들놈이 가끔 가다 내 영어 발음을 갖고 문법이 틀렸다고 가르쳐 주겠다고 거드름을 피울때면 은근히 속으로 부아가 난다.

유치원에 갈때는 한 마디도 못해서 Toilet 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외우게 해서 보냈건만.........

대학생 이었던 시절 한때는 나는 현지에 가서 살면 한 일년이면 그리고 영어권에서 한 6개월만 살면 다 통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당찬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호기인가를 절감하지만.....사람이 착각속에 산다고.....넘어지고 깨어져봐야....안다고....

오늘도 후배선교사들을 가르치면서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본다. " 이 놈들 중에도 사역지에서 산지가 얼만데 아직도 영어를 저정도로 밖에 못할까 ? 라고 속으로 팔짱을 끼고 비평할 녀석들이 있겠지."

아직도 못되 먹은 심보가 내 속으로는 " 그래도 너희도 한번 소가 되봐라 " 그러면 네 꼬라지를 알게 될테니까...." 물론 그것은 순간의 생각이고 나는 그들이 앞으로 경험하고 넘어가야할 그 일들을 생각해 보게 되면 가슴이 짠하게 아파 온다.

오늘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부푼꿈을 안고 선교지로 나간다.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 그래 많이 실수 하고 많이 절망해 봐라............그러나 절망만이 있는게 아니라 그 절망이 있기 때문에 은혜를 경험하는데............나는 후배들에게 늘 이렇게 당부한다. " 여러분 똑똑한 선교사 되지 말고요......선교지에서 오래 버티는 선교사가 되세요..........그러면 뭔가 길이 보일 겁니다.

그렇다. 만일 내가 그때 더 실수를 두려워 하지 않고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조바심이 없었다면........

소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실수를 참 많이도 했다. 아니 지금도 나는 실수와 허물 투성이고 실패하고 넘어진다.

하지만 깊은 절망의 신음 속에 있을때 내게 들려 주었던 나의 영국인 리더의 말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 Johnny, You must remember that God is much bigger than your mistakes, God is not like a police men. He is our Father and our Helper."

그렇다. 나는 오늘도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 그 말을 되 새기어 본다.

내 하나님은 내 실수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나의 도움을 주시는 내 아버지 임을..................."

졸업식을 마치며..........

어제 저녁, 지난 4개월 동안 진행됬던 오엠 선교사들의 훈련 프로그램인 ICC(Inter Cultural Communication) 졸업식이 있었다.

이번 졸업식은 예년과 정말 다른 졸업식 임을 느낀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더욱더 차분하고, 더욱더 비장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어쩌면 이 프로그램이 너무나 은혜롭게 진행되고 끝날 수 있다는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은혜의 경험이었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오엠 20주년 행사로 한국에 들어가 있을 때, 아내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 프로그램을 전담하던 김 목사 가정이 계속되는 Depression으로 한국으로 요양을 필요로 하고 한국으로 귀국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이다.

한창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가운데, 내가 달리 취할 어떤 방도도 없음을 안다.

그래서 급하게 귀국할 것을 이야기 하고, 나는 짧은 한국의 일정을 마치고 센터로 돌아왔다.



내 마음은 센터의 건축문제며, 센터 인수에 대한 재단과의 끝임없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리고 아내로 보고 받는 끊임없는 재정난의 어려움, 아내는 이미 벼랑끝에 서있었고, 신경은 바늘끝 이었다.

사무실에 돌아와서 한동안 정말 망연히 창문밖을 응시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술에는 짧은 탄식의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 하나님 과연 올해 이 프로그램을 할 여력이 될까요? 어떻게 또 이 젋은 사람들과의 싸움(?)을 치뤄야 하나요......도와 주세요.....!"

재정문제와 재단과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내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내려 놓고 포기하는 것이 최선의 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김목사가 지난 3년동안 그래도 큰 힘이 되었는데, 준비를 하다보니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자료를 찾는 일로 메일을 보냈을 때 김 목사는 사실은 외부와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공항에 선교사들이 도착하는 날,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미리 나온 선교사들에게 모일것을 지시하고 급하게 기도하라고 지시를 하였다. 나도 공항 출구문을 바라보며 눈을 뜨고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들이 아무일 없이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그리고 얼마후에 이민성에 오래동안 머물러 있던 선교사들이 나왔다. 팀 리더로 오면 보명 전도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제는 방문비자로 입국하는 사람들도 매우 까다로와 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중 누가, 뉴질랜드 들어오는 것조차 어려운 것은 아마도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 같아요...!"

나도 그 말에 동의를 하였다. 선교사로 사는 순간부터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주권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것이 오엠 선교사들과 첫 대면 이었다.

무척이나 어수선하고, 이들도 얼마나 많이 놀랐을까.................?



이들의 입국 날자와 학교 텀과의 차이로 인하여, 첫 2주간은 학교는 방학 기간이었고, 그래서 2 주간의 인텐시브한 Mission Perspective Course 수업을 시작하였다.

영어가 안되는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충분한 휴식도 없이 오전내내 진행되는 영어강의는 어쩌면 너무나 힘든 일임을 안다.

하지만, 이들이 앞으로 사역지에서 겪어야 할 일이기에, 나는 기도 하며 진행을 하였다.

2-3일이 지난 날, 한 형제가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강의를 정말로 하나도 알아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영어가 너무 기초가 안되서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른다고 하소연을 하는 셈이다.

형제에게, 선택은 두 가지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과, 힘들고 어렵지만 끝까지 하는 방법 둘 중에 다른 대안은 없다" 말 하였다.

형제의 얼굴은 너무나 경직되었고,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형제를 사무실에서 내 보내고 나니 20여년 전의 내 모습이 생각이 났다.

영어를 그래도 한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수련회 기간동안 쏟아지는 메세지를 정말로 알아 듣기 힘들어........

혼자 수련회장 주변을 산책하며, 한 없이 울면서 기도 했던 생각이 났다.



어쩌면 이것은 한국 선교사들의 숙명인지 모른다.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내가 약해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나는 혹독하리 만치 강의를 평상시처럼 진행을 하였다.

얼굴을 들지 못하고 땅만 쳐다보는 선교사, 얼굴이 다들 사색이 되어, 웃는 얼굴을 볼수가 없었다.

키위 스탭들은 너무 무리가 아니냐고 내게 말을 하였다. 그리고 강의를 알아 들을 수 없는데, 과연 이 세미나가 얼만큼 도움이 될까 ? 하고 약간의 의심을 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그 분의 놀라운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선교사들의 눈에 고이는 눈물을 보았다.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들으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구약에서 부터 신약의 마지막 장까지 흐르는 구속의 놀라운 계획을 들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할 수 있었고, 나의 가슴도 다시 벅차 오르기 시작하였다.



엄청난 양의 독서과제와 숙제, 방대한 양을 소화해 내야 하는 코스지만, 이 과정을 통해, 왜 우리가 선교를 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훈련 프로그램이 이제 끝에 와 있다니.

작은 변화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감사했고, 건강하게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이들이 4개월을 견뎌준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특별히 3주간 진행됬던 3주간의 정말로 Hard Training 이었던 전도여행은 이들이 지금껏 교실에서 배운것을 실전에서 경험해 보는 시간이었다.

교인 8명 정도 밖에 안되는 아죽 작은 타운에서 우리 훈련생들만 남겨 놓고 나는 전적으로 이들이 프로그램을 짜고, 전도하는 사역을 하도록 하였다. 추운 겨울인데도 나는 이들을 교회에서 슬립핑백을 덥고 자도록 하는 정말로 힘든 전도 훈련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들이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사역을 하고 영혼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오클랜드와 Te Awamutu 지역에서 진행된 Door to Door 사역까지,정말로 숨가쁜 시간이었다.



Waihi 크리스천 캠프에서, 1박 2일간의 수련회를 통해서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자정이면 끝날 줄 알았던 나눔이 새벽 5시가 넘도록 진행이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 속에서 나는 정말로 아름다운 주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변화들이 이들에게서 일어 났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졸업식은 많은 지역교회의 친구들이 참석을 하여 이들을 격려하여 주었다.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이날 선포되어진 메세지, Never Give up ! 이라는 초청선교사님의 말씀은 나를 향한 말씀 같았다.



정말 아쉬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지난 몇년간을 수많은 이별을 하는데도 복받쳐 오르는 눈물은 어찌할 수가 없는 것 같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1992년말 처음 훈련 사역을 시작할때 내 훈련생들 중에는 형님뻘 되는 사람들이 참 많았는데, 이제는 훈련생들이 정말 나의 자녀 같은 연령대로 바끠어 간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 아 참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이제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아비와 같은 일을 하시기를 원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

아버지의 마음 !!!!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 그리고 나는 이들을 향한 아비의 마음을 느껴 본다.

이제는 젊음이 아름다워 보인다.

이들의 싱싱한 패기와 그리고 유쾌함이 사랑스럽고, 그리고 이들의 발라함이 부러워 진다.

옛날에는 내가 무대위에서 그렇게 설쳐(?) 댔었는데 이제는 나는 뒤에서 미소를 머금고 박수를 보내는 그런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흘렀구나 !!!! 이제 토요일 일요일이면 각자의 사역지로 떠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정말로 한 없는 격려가 있기를 기도한다.

이제는 이들이 한없이 부러워 진다.

이들을 아직 섬길 수 있음이 감사할 따름이다.

2010년 8월 8일 일요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

돈으로 음식은 살 수 있으나 식욕은 살 수 없고,
약을 살 수 있으나 건강은 살 수 없다.
재미는 살 수 있으나 지속적인 기쁨을 살 수 없고,
친분은 살 수 있으나 친구는 얻을 수 없다.
하인은 구할 수 있으나 충성심을 살 수 없고,
여가는 얻을 수 있으나 평온함을 얻을 수는 없다.
십자가 목걸이를 살 수 있어도 구원을 살 수는 없다.

<안 가보그, 영국의 코미디언>



이 평범한 진리를 철학자나 교수나 종교인이 아니라 희극인이 깨달았다는 사실이 더욱 더 놀랍니다.

짧은 글이지만 내 마음으로 100% 공감이 가는 그러한 말 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평범한 삶의 영역에서 자신을 컨트롤 하지 못하기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가깝게는 나 자신도 때때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해 얼마나 고통 스러워 하는 경험합니다.

나에게는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사람들로부터의 배신,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절망스러운 실망등......

이것 역시 나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절감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모든 사람이 충성스러우리라 기대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도 정말로 자신의 일에 충성된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재능있는 사람은 찾을 수 있고 재능은 살 수 있지만 충성스러움을 살 수 없다는 이 평범함의 진리가 얼마나 처절한 현실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쉼은 물리적인 시간의 정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강에서 온다는 사실을 발 견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세상을 떠나시기전 그의 제자들에게 "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라고 말씀 하셨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수없는 삶의 현장에서 마음의 평온을 잃어 버린 사람들이 가슴의 고통을 안고 살아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내 노력과 나의 간절함으로도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돕는 자선사업을 한다 할지라도, 수많은 병자를 고치는 일을 할 지라도 구원은 주시는 이의 은총의 선물이지 내가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은 나의 의가 될 수 없나 봅니다.

그래서 구원은 구원을 주신 이에 대한 감사함을 늘 열매로 얻게 하십니다.

그것이 어쩌면 기독교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예배" 일지 모르겠습니다.

감사 하기 때문에, 그의 은혜가 크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쁨과 감사를 잃어 버리지 않는 것 ,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있어서의 예배일 것입니다.



돈을 통해서도 살 수 없는 그 구원을 내가 얻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어쩌면 간단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가슴속에 " 감사함이 있는 가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가 여전히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나는 분명히 구원받은 자 일 것이 분명합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코메디언이 우리에게 알려 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웃음은 인간에게만 주신 감사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저는 동물이 웃는 다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동물도 슬픔을 느낄 수 있지만 인간에게 처럼 환한 미소로, 통쾌한 소리로 감사의 기쁨을 표현하는 웃음이야 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선물 일 것입니다.



당신은 감사하고 있나요?

당신은 웃고 있나요?

2010년 8월 6일 금요일

베다니의 집처럼.......

어제는 우리 오엠팀들과 사역을 같이 하는 North End 교회의 요청으로 우리 훈련생들을 데리고 기도 모임에 참석을 하였다.

얼마전 교회 안에 있는 몇 몇의 사람들이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며 자발적인 기도 소그룹셈이다.

Door to Door 사역을 11년째 해오고 있는 게리 목사의 가정이 주축이 되어 여러명의 사람들이 이 기도 모임 가운데 함께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날은 프랑스, 중국, 한국, 인도, 그리고 마오리, 백인 키위 사람들이 함께 모인 다국적 모임의 기도모임이 되었다.



아마도 우리 오엠 훈련생들과 함께 한 시간들 속에서 교인들이 선교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는 게리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록 영어들이 부족하지만 그 들이 하나님앞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도 도전을 받은것 같다.

기도 모임 가운데 ICI 사역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한 짧게 ICI의 비전을 나누었다.

그리고 게리 목사의 말대로 오늘밤은 특별히 선교를 위한 기도를 하자고 제안을 하여 우리는 인도와 북한, 그리고 한국교회, 우간다. 프랑스와 그리고 뉴질랜드 교회를 위하여 기도 하였다.

프랑스를 위해 기도할때 가슴속 깊은 속에서 하나님이 아파하는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기독교인이 1%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정말로 믿기 어려운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안타까운 것일까.....



그러면서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였다. 한국교회의 자고함을 회개하였다. 이제 선교사 2만 파송의 아직도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30년이 넘지 않는 한국교회가 벌써 서서히 성장이 정체되어지고 서서히 선교의 열기가 식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혹 뉴질랜드 교회처럼, 그리고 유럽의 교회처럼 교회의 노령화가 급속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

가슴이 저며오는 고통을 느낀다.

이곳에 나와 있는 이 젊은 이들이 한국의 미래일텐데.......



자녀를 가진 크리스찬 부모들이 정말로 best의 자격을 갖춘 아이들을 선교사로 내어 보낼 수 있을때....한국교회는 하나님앞에 그 소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모임이 끝나고 장소를 제공했던 집주인이 나를 따로 불러 교제를 하였다.

교회에 이 젊은이들이 왔을때만 하더라도 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하나님이 무엇인가 자기에게 말씀 하시는 것을 느낀다고 고백하였다.

사실은 기도 하면서 커다란 라운지, 그리고 방이 아마도 7-8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그리고 넓은 마당을 보면서 속으로 " 하나님 이런 시설이 선교사 재충전 프로그램을 위한 숙소로 쓰여지면 참 좋겠습니다. "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미친것 같다.

아는 집사님은 옆에서 그 동안 내가 기도로 씨름하고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 목사님 이제 선교사 안식관 뭐 그런 이야기 하지도 마십시오"

그런데도 나는 미친 생각을 해 본다.

일반 개인도 이렇게 커다란 집에서 생활을 하는데.........수많은 선교사들이 지치고 힘들때 와서 재충전을 받고 나아갈 수 있는 선교사 케어센터가 있어야 하는 것 이 아닐까.................

그래서 성경을 공부하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그들의 상처를 어루 만질수 있는 그런 상담의 장소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요즘 계속 가슴속에 남는다.

어쩌면 내가 이 일을 못할 수도 있겠지.......하지만 오늘도 사역지에서 고생하는 선교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오는 아픔을 느낀다.



이본이라는 집주인과 함께 교제를 하는 동안 게리 목사가 다가와.....앞으로 ICI와 좀더 긴밀한 교제와 연합의 기도를 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고백한다.

아마도 성령님이 동.서를 묶어 함께 연합하는 모습을 보시기를 원하시는 지 모르겠다.

게리 목사에게, " Let us see how God is leading us into !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을 우리 보십시다" 라고 말하였다.



내가 얼마나 기도해 왔던 것이었을까.....! 지역교회가 함께 연합을 할때....ICI의 사역은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되리라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 다른 기적을 베푸시는 모습을 보기를 원한다.

베다니에 예수님이 가실때마다 머무셨던 마리아와 나사로의 집처럼......선교사들이 힘들고 지칠때마다 와서 쉴수 있는 그런 공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간절히 간구하여 본다.

2010년 7월 26일 월요일

" 심지도 않은 것이 .......""

오랜 외유(?) 생활을 마치고 훈련 센터 안으로 이사를 하였다.

뉴질랜드로 온지 꼭 7년만의 이사다. 스텝들의 주택부족으로 인해 늘 우리는 우선순위에 밀려 초기에 가졌던 훈련생들과 생활을 같이 한다는 나의 사역철학은 다른 스텝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출퇴근을 하는 쪽을 택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알리 없는 사람들은 책임자가 센터에서 안 살고 밖에서 편하게(?) 출퇴근을 한다고 은근한 비난(?)의 소리도 들려 온다.

이것이 책임을 맡은자와 아닌자의 차이구나 하는 생각을 뼈저리게 해 본다. 책임자는 어느 곳에 있던지 자기희생과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임을 이론이 아닌 삶으로 체득하는 시간들이다.

함께 일할때 누군가를 리더로 두고 일하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 일인줄을 왜 그때는 알지 못했을까....그때 나의 리더들은 그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고심을 하였을까 하고 생각을 해 보니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사실 오엠에서 악명이 높은 필드가 런던에서 교회 사역을 하던 팀이었다. 적은 선교비로 고물가의 런던에서 산다는 자체가 무리였지만 그럼에도 팀원들은 적은 생활비와 열악한 주택환경, 적은 용돈 늘 자기에게 보여지던 숫자에만 관심을 가졌지........나도 단 한번도 내 리더가 얼마나 가슴조리며 기도하며 사역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보지 못했으니.......

내가 런던을 떠나.......훈련센터를 개척하며 생존을 위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런던의 내 미국인 리더가 생각이 났다. 나는 얼마나 우아하게 다른 사람들의 불평에 맞장구를 치며 우리 리더 흉을 봤는지.... 그것이 이제 내 몫이 되었다. 얼마전 독일에서 장기사역자들의 모임이 있어 정말 실로 몇년만에 조우를 하였다.

그때 나는 그에게 다가서서 정말로 애정어린 포응을 하며 " Dear Brother, Now, I'm respecting you sincerely from deep down in my heart. " 내가 정말 진심으로 이제 너를 존경한다" 라고 말을 하였다.

어리둥절하는 그 형제를 표정을 보며 .....그렇지난 지난 20녀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런던을 지킨 그 형제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지..............

우리는 남의 처지가 되어봐야 비로서 그 사람을 이해 할 수 있나 보다.



서론이 너무 길었나 보다. 나는 센터 입성의 기념 사업(ㅎㅎ)으로 뒷 마당에 채소밭을 만들었다. 물론 그 전에 살던 집에도 뒷터에 채소밭을 만들 수 있었지만 센터를 오가며 받는 스트레스며 시간이 나에게 그런 여유를 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출퇴근을 안하고.....그 시간의 여유를 채소밭을 일구며 그곳에 처음으로 상추와, 배추, 실파, 부추, 치커리 등 다양한 채소를 정성껏 심었다.

그야말로 유기농 농사였다. 아침 저녁이면 물을 주고, 내가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농사인 셈이었다.

씨를 뿌리고 싹이 나는 데에는 몇일이 걸렸다. 얼마나 조바심이 나는지...

하루에도 몇번씩 싹을 들여다 보며 이게 언제나 자라나........싹이라도 나면 손으로 살짝 들어올려서라도 그 키를 한치라도 늘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던 그 땅에서 드디어 파란 새싹이 나올때의 기쁨이란....

역시 경험이 없는 농부는 그 시간을 조바심과 초조함으로 보내나 보구나.....

그러면서 순간 그런 깨달음을 얻어 보았다. 나는 얼마나 이 같이 내가 돌보는 영혼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하여 이런 조바심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예수를 믿게 하기까지도 조바심나게 지나친 강요도 하고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고 나면 그 어린 사람에게 엄청난 양의 양육이랍시고 쏟아 부었던 강압적인 자기열정으로 인한 제자양육(우리는 그렇게 부르며 어린 영혼들에게 고문을 한 것이다)을 한다며 그들을 괴롭히고.....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나 자주 영혼들에게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또 쉽게 포기하는지, 모든 것이 자기열정이고 자기열심의 열매였다.

농사에 있어서 조바심은 쥐약이고 죄악임을 깨달으니 나의 지난날의 실수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 선교사들을 얼마나 자주 그런 실수를 할까......

빨리 열매를 보고 싶고 빨리 결과를 보고 싶은 마음에....그것이 되지 않아 끝내 기다리지 못하고 사역지를 떠나는....................조급증의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우리는 그런 실수를 하고야 말게 되겠구나.......



싹이 나고 채소가 자라며 또 하나의 난제가 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잡초와의 전쟁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내가 분명히 심지도 않은 이 잡초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리고 잡초는 내가 정성껏 주는 물과 영양분을 받아 먹으며 채소 보다 더 무서운 속도로 자라는 것이다. 조금 게을러 나중에 " 라고 미루다 보면 잡초는 어느내 큰 키로 자라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심지도 않은 것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지만 엄연한 현실이고 잡초와의 지리한 전쟁은 조그만 채소밭을 가꾸는 일에도 존재 하는 것이다.

내일해야지.......!! " 조그만 게우름을 피우면 채소는 잡초의 그늘 아래도 모양도 감추어 버릴 정도로 잡초들의 생명력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의 가라지 비유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그렇구나......내가 매일 매일 마땅히 해야하는 수고와 자기결단의 순종함이 없으면 가라지와 잡초가 알곡보다 더 큰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인격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때론 고독함이, 외로움이, 억울한 심정이....염려들이....마치 우리의 영혼의 밭에 심겨진 잡초처럼 자리를 잡고 자라나고 있는 것이구나.......

내가 말씀으로, 기도와 순종으로 이 잡초들을 뽑아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열매를 맺어야 할 내 영혼의 밭은 온통 잡초로 무성해 져 버리는 것임을...........

뉴질랜드는 겨울이다. 이제 봄이 되면 다시 조그마한 농사를 지워 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방치해 두었던 내 영혼의 밭도 잡초를 뽑아 버리고 새로운 씨앗을 뿌리듯 이제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가꾸어야 겠다.



채소밭을 가꾸는 일은 신비한 일이다. 심지도 않은 것이........................

내 인격의 밭에도 우리는 심지도 않은 것들이 자라나도록 허용하고는 있지는 않는지......???

" 더러는 의심하는 자들도 있더라 " ....

- "선교사의 소명을 어떻게 받으셨나요? " -

꽤 수년전의 일이다. 터키에서 사역을 하던 중 복음전도의 혐의로 경찰에 체포가 되어 구금이 되었고 그리고 급기야 나는 추방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럴 때 우리 오엠의 태평양지역 책임자였던 " Allan Adams " 선교사의 권유와 오엠 코리아의 요청으로 오엠 본부에서 선교사 훈련원 사역을 하던 때다. 그때만 해도 한국교회가 모슬렘 선교에 아직 이해가 부족한 때였고 아직도 모슬렘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숫자가 아주 작은 그런 시절이었다.

사실 뼈를 묻겠다고 터키로 갔던 내가 그렇게 빨리 한국을 돌아올 줄은 생각을 못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왜 내가 국내에 들어와서 선교사 훈련이라는 일을 해야 하는지 조금은 혼돈 스러운 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서히 나는 그 일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더 많은 한국의 젊은이 들이 복음을 들고 열방을 향하여 나아 가기를 원하셨고 그리고 모슬렘권을 향하여 나갈 선교사들이 요청 되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급하셨기에 나같이 선교경험이 미천한 나를 선교사 훈련이라는 막중한 일을 시키셨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선교사 훈련원을 맏으면서 나는 우리 훈련생들에게 이슬람권 선교의 필요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었고 또 선교한국의 조직위원 으로서 일을 하면서 나는 대학이나 그리고 교회 선교단체의 수련회 등지에서 선교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졌고 그럴때 마다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터키 경험을 이야기 할 수 있었고 그리고 모슬렘권 선교의 필요성을 나누게 되었다.

때로는 가끔 수년이 지나 " 선교사님의 강의를 듣고 이슬람권 사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또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노라고.... 그 중의 더러는 터키에서 사역을 하고 있고 나보다 더 오래도록 뿌리를 박으며 이제는 전문인 사역자로 귀한 사역을 감당하는 선교사들을 보노라면 ...아...어쩌면 하나님은 나를 이일 때문에 나를 그렇게 빨리도 한국으로 불렀었나 보다 하고 스스로를 위안해 보기도 한다.

훈련원 사역시절 나는 우리 선교훈련생으로부터 또는 교회나 선교단체의 학생들로부터 반복적으로 받던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오늘도 모든 선교사들이 직면하는 진지한 질문일 수도 있고 또 확인되어야 할 중요한 이슈가 아닐까 믿는다.

" 선교사님, 선교사님은 어떻게 선교의 소명을 받으셨어요? 그리고 어떻게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확인 하실 수 있으셨어요?

그리고 많은 이들은 이 소명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때문에 수년을 결단하지 못하고 그들이 기다리는 하늘로 부터의 주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야 왜 많은 선교헌신자들이 우리의 귀한 주님의 자녀들이 그 소명을 확인하기 위해 얼마나 진지하게 기다리고 확증을 받기를 원하고 또 소명에 대한 성경적인 오해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는 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소명 ! 특별히 선교사로서의 소명은 아주 특별한 부르심이 아닐 수 없고 의심할 여지 없이 너무나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이 소명이 불확실하면 선교지에서 많은 이들이 그들이 닥치는 어려운 순간에 흔들리게 되고 급기야는 사역을 포기하고 중도에 들어오는 중도 탈락자의 대열에 합휴하게 되기 때 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은 소명을 어떻게 이해 하고 있는 것일까?

선교 소명에 대한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이해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다메섹 도상의 환상 -

어떤 이들은 (그것이 성경적인 사실이고 그것을 뒷받친 한다 할지라도) 선교사는 바울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아주 특별한 환상, 비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성경의 패턴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을 부르실 때 이러한 개인적이고도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에스셀이나, 다니엘이나, 그리고 에레미야나 요엘과 같은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전적인 특별한 영적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로 부르심을 받게 되어 지는 것을 보게 된다.

바울은 신약에 있어서 이러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열두제자의 부르심의 사건을 생각해 볼때면 바울의 경험한 다메섹상에서의 부르심은 신약에 있어서도 매우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2. 마게도니아의 환상 -

바울은 어느날 환상을 통해서 " 와서 도우라 " 고 말하시는 마게도니아의 환상을 보게 되어진다.

때때로 나는 다른 선교사님들의 간증을 들을 때 마게도니아의 환상처럼 기도 가운데 또는 꿈을 통해서 자신이 가야할 선교지 사람들을 생생하게 보게 되고 나중에 그 환상에서 보았던 이들을 다른 매체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면서 자신들을 그 나라 또는 그 민족으로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을 확인하고 환신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경험이 있다면 얼마나 더 분명하고 흔들림 없이 선교사역에 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3. 지상 위임 대명령 ....

수년전 내가 만났던 미국 선교사님이 계셨다. 그는 북부아프리카에서 근 30년 가까이를 사역하셨던 베테랑급 선교사 였다.

내가 그 분에게 동일한 질문을 드렸던 생각이 난다. " 선교사님은 하나님께서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리고 어떤 확신을 통해서 선교사로 헌신하시게 되었습니까? "

그런데 나는 그 분으로부터 아주 뜻밖의 답변을 받게 되었다. "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하나님의 거듭난 모든 제자들에게 마28:18-20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민족과 열방으로 나아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제자삼는 일을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보다 더 큰 명령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명령앞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는 성경을 보면서 이 말씀을 들었고 또 믿었고 그때 이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말씀에 순종하여 선교사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

그분은 30여년이 넘은 사역 시간 동안 한번도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흔들려 보거나 의심해 본 적이 없으셨다.

즉 전도와 선교에 대한 부르심은 명령이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의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 ! 얼마나 명쾌한 고백인가 ? 우리는 이 선교사님의 고백을 진지하게 마음을 열고 경청 해야 하리라 믿는다.



4. 나의 신앙의 여정 -



종종 선교훈련생들과 사람들이 내게 선교의 소명에 대한 질문을 하곤 한다. " 송 선교사님은 어떻게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을 받으셨나요? " 나는 이 질문을 받을 때면 참으로 많이 망설여 질때가 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바울과 같은 드라마틱한 회심을 통한 특별한 부르심의 경험도 없었고 또 마게도니아 환상과 같은 특별한 영적인 체험도 내게는 없기 때문에....때로 내 간증을 듣는 이들이 혹여나 그들의 기대하며 듣고 싶은 그런 특별함이 없어 혹 실망(?)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 대답을 하기에 나는 나의 인생의 여정의 한 부분을 나누는 것이 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1) 나의 신앙의 첫걸음

나는 중1 시절 친구의 전도를 받아 교회를 처음 나가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를 입학했을때 아버님이 병환에 누워 계셨다. 내가 세상에 나왔을때 아버지의 연세가 이미 54이셨기에 막내에다 늦둥이인 나는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듣뿍 받고 자랐던 것 같았다.

나의 유년시절은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어떤 영적인 갈급함도 또 진지한 인생에 대한 어떤 사색도 없는 그 야 말로 천진난만하게 놀기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는 그런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러한 나에게 아버님의 죽음은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변화시켰다.

오랜 병환으로 가게는 점점 기울어 졌고, 그러면서 우리는 운영하던 가게와 여관을 처분하고 아버님이 쉬실 수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고 그곳에서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그리고 중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을 어느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길 친구와 함께 막 집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골목 중간에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장의사의 부고 등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친구에게 " 누가 돌아 가셨나봐....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 장의사 등은 바로 우리 집 대문 앞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들어섰을때 이미 병풍으로 가려지 아버님의 시신과......촛불과 향불이 피어져 있었고 실신직전의 아주 놀람과 슬픈 표정을 하고 계신 엄마의 모습만이 내 눈앞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어느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버님의 죽음은 지금도 내게는 지워지지 않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장례를 치르고.....나는 몇개월을 불면증에 시달렸다. 늦은 저녁이 되면 마치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계셔서 방에 계실것 만 같은 그런 생각.........그것은 너무나도 생생한 착각이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아니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가득 덮기 시작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지옥과 천국은 있는 것일까? 만일 한번은 죽는 것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옮은 삶일까?

어느날 수업시간에 나는 루이제 린저라는 작가가 쓴 " 왜 사느냐고 묻거든?" 이라는 책을 읽다 영어 선생님한테 걸려 야단을 맞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죽음 뒤에 대한 영원한 세계에 대한 절박한 궁금증은 더 해 가기만 했다.

불교나....몰몬교...그리고 인도 철학서적도 뒤적여 보기도 하고 나는 어리지만 정신적인 구도자였던 것이다.

그런 나를 학교의 친한 친구가 지속적으로 교회로 나를 인도 하였다.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교회가 체육대회를 하는 날을 계기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고.........딱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정말 개인적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기전임에도 꽤나 열심히 교회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 같다.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점점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역사적인 존재성에 대한 의문과 그리고 믿음의 점진적인 구도자의 삶이 지속됬던것 같다.

그런나를 주님은 중학교 3학년을 마치는 시점에 만나 주셨다. 공원에 전도를 나온 전도자를 통해서 오늘 학생이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영적 단계에 도달하셨습니까?

그 질문은 나를 두려움과 그리고 나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했고 깊은 사색을 하게 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성경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때마침 로마서를 공부하는 성경공부 그룹에 참여하게 되고, 많은 기독 서적들을 통해서 근본적인 나의 신앙의 의문점에 답변을 스스로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롬 5:8 절을 통해서 주님은 나를 만나 주셨다. 그토록 하나님의 사랑과 죄 용서함에 대한 확신을 갖기를 기도했는데....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미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음을 너무나 분명하게 깨닫게 되고 믿어지게 되었다.

그 때 정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그후로 나는 단 한번도 나의 구원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죄를 위한 주님의 희생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2)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예수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고2때 나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내에서 신앙운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니 우리도 12명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무대가 갈릴리이니 갈릴리 선교회란 이름으로 명칭을 짓고 활동하였다. 우리의 기도제목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학원복음화와 성남시의 학원복음화였다. 보잘것 없는 우리들이 참 꿈은 크게 가진것 같다.

1980년 한국에는 대학생선교회(C.C,C)를 중심을로 민족복음화" 운동이 한참 전개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나의 신앙성장을 위한 갈망 때문에 정동에서 모이는 고등부 모임에 나가고 있었다. " 나는 찾았네' 라는 케체 프레이지로 정말로 대대적인 그런 전도 운동이었다.

나의 마음에도 그런 소망이 불타 올랐다. 그래서 우리 갈릴리 선교회를 중심으로 성남시 한원복음화를 위한 전도대회를 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실로 맹랑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John Knox의 기도처럼 " 하나님 우리에게 성남을 주십시오 " 하고 기도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성남시에 있는 모든 교회 학생부 회장들에게 서신을 발송했다.

성남시 청소년 복음화를 위한 준비모임을 열자는 것이었다.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성남에서 그래도 제일 큰 교회건물을 갖고 있었던 성남제일교회의 담임목사님을 찾아가 뵈었다. 그리고 우리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교회를 모임 장소로 썼으면 한다고 요청을 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목사님이 꽤나 황당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목사님은 흔쾌히 허락을 했고 그리고 봉투에 그 일을 위해 쓰라고 헌금을 하여 주셨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두세번의 준비 모임이 열렸고.......나는 준비위원회에서 연합회장으로 그리고 갈릴리 선교회 멤버들이 임원으로 그리고 그 모임을 통해서 알게된 다른 학교출신의 친구들이 준비임원으로 그렇게 조직이 되었다.

참 다들 맹랑한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참 감사한 것은 그 때 그렇게 무모하게 이 일을 동조하고 벌렸던 친구들이 지금의 나의 정말로 막역하고 유일한 신앙의 친구들이 될줄은 생각을 못했다.



우리는 대학생 선교회 고등부 대표간사님을 찾아가 뵙고 " 왜 성남에는 이 집회가 계획되지 않느냐...우리가 준비할테니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간사님도 우리를 격려하여 주셨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것은 우리가 준비해야만 했다. 다만 집회때의 강사님만 소개를 해주시고 그리고 강사님도 우리가 연락을 취하여 확인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남교회를 빌려 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때 우리 모임을 위해 이 영무 축구선수(목사) 그리고 요들송을 부르던 김홍철씨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주셨다.

대회는 정말 아름답게 치루어졌고..집회후에는 사랑의 헌혈운동 본부장이셨던 박진탁 목사님과 연결이 되어 많은 친구들이 헌현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장충 체육관에서 고등부 본 집회가 열렸다.

정말 많은 고등부 학생들이 그 체육관에서 모여서 찬양을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때 내 마음을 사로 잡았던 메세지는 김준곤 목사님의 꿈" 이야기 였다.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최초의 달 유영을 했던 우주인 이었던 암스트롱으 간증과 메세지는 나의 온 몸을 전율케 하였다.

아....하나님은 정말로 크고 광대한 분이시구나..........그때 그 분은 앞으로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드릴 사람들을 요청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것이 내가 목사로서, 아니 그 무엇인 된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고 주님 앞에 드렸던 첫번째 헌신 이었다.

나는 그때 어려풋 하지만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강력한 힘이 내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비로서 주님의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 나는 내 인생의 항로를 결정하는 마음의 키를 그 분 앞에 드렸기 때문이다.

3) 신학교에서-

그리고 나는 신학대학을 들어갔다. 학교를 들어갈때 신학교를 가는 친구들과 그래도 우리가 이 다음에 크면 교단 일치 운동을 위해서 신학교를 나누어서 가면 어떨까 의논하였다. 그래서 나는 장로교를 다녔지만 서울신학대학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그리고 앞으로 제자훈련 사역을 하려면 교육적인 사역이 필요할 것 같아 기독교교육을 학부에서 전공해 보기로 하였다.



입학후 나는 많은 고민을 하였다. 신학대학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많은 실망이 몰려왔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 일단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가기로 하였다.

일종의 도피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제대를 하고..일단은 진로를 결정하기전에 복학후에 하기로 하고 일년을 다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일반대로 가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가운데 휴학을 하고....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다시 신학교로 부르셨다. 내가 공부를 하면서 유성전자고등학교의 숙직담당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때 나는 저녁에 많은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때 주님은 나를 신학교로 다시 가라고 말씀 하시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나는 방황없이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시국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88년에는 학회장으로 일을 하면서 시국의 격랑속에서 흔들리는 경험을 하였다. 혼돈의 시절이었다. 좌와 우의 이념논쟁과 운동권이 대부분의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시절 - 내가 학생회를 이끌어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나는 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을 썼다. 다른 학생들은 나를 어용 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데모를 반대하니....의식이 없는 학생장이라는 것이었다. 눈물을 삼키면서 외로운 싸움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도 하나님은 나에게 또 다른 계획하고 계셨다. 복학한 후에 나는 영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유학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있었나 보다. 가난한 내가 유학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할 수 없지만...하지만 어렴풋 하지만 막역한 계획이라고 할까...... 그때 그것이 나의 흔들리는 정체성, 그리고 일종의 가난한 나의 상황을 극복하는 일련의 탈출 행위가 아니었는가 싶다.

그때 나에게 도움을 준 것은 OMS 선교사로 서울신대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Trude Higbee 선교사 였다.

나는 영어성경공부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고 그리고 또 연세가 많으셨던 Fran Peterson 선교사과 교제하게 되었다.

프랜 선교사님은 초기 한국선교사의 딸로서 원산에서 유년기를 보낸 MK(Missionary Kid) 였다. 그 분의 한국말은 이북 사투리의 독특한 억양이었다.

특별히 프랜 할머니는 나의 발음을 얼마나 자상하게 고쳐 주려고 애를 쓰셨는지....

그러던 어느날 프랜 할머니가 나보고 오엠선교회에서 하는 " Love Europe"를 참석해 보는게 어떻겠냐고 물어 보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언가 의아해 했는데 학교에 보니 러브유럽을 알리는 포스커가 붙어 있었다.



나는 프랜 할머니의 적극적인 권유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러브유럽을 참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할머니는 나에게 $500 의 지원금을 주셨다. 이제는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러브 유럽 준비모임을 나가면서 필요한 선교비가 채워지도록 기도하였고 어머니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는 러브유럽에 참석하게 되었다. 독일 오펜버흐에서 개최된 일주일간의 수련회는 그야말로 천국의 경험이었다. 커다란 공장건물을 대회장으로 개조하였는데 약 30명이 넘는 지원봉사자들이 수고를 하고...조지버워, 토니 캄펠로 같은 강사들이 뿜어내는 열정 어린 설교는 내 마음을 흔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내 마음을 가장 감동 시킨 것은 예배 시간이었다.

약 5천명의 참석자들이 전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대회장은 마치 인종전시장 같았고 각 언어별로 통역되는 설교를 들으면서 그야말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는 그런 체험의 장이기도 하였다.

" We are marching in the light of God " 를 한 목소리로 부르면서 손에 손을 잡고 대회장을 행진하면서 찬양을 부르기도 하고.....마치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날 천국에서의 예배, 모든 족속과 방언이 호산나를 외치며 부르는 그 예배가 지금 이곳에서도 이루어 지기 때문 인 것이다.

성령의 강한 물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선택한 벨기에의 겐트(Gent)도시에서 모슬렘 사역을 시작하였다. 나는 그곳에 그렇게 많은 터키인과 북아프리카에서 온 모슬렘들이 살고 있는줄 몰랐었다.

우리 팀은 매일 골목에 나가 터키인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였다. 몇 마디의 터키어를 배워 전도지를 나누워 주고...또 돌아와서는 터키에서 사역하였던 미리암 이라는 네덜란드 출신의 싱글 선교사가 터키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 하여 주었다. 나는 미리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부그러웠는줄 모른다.

신학교에서 성서지리와 선교학을 배우며 바울의 전도여행도 배우고 소아시의 교회들은 알았지만 지금의 그 땅이 어떤 사람들이 어떻세 살고 있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성서속의 그 땅이 지금은 인구 5천8백만의 인구 가운데 150명 정도의 기독교인 밖에 없는 복음의 황폐화된 땅으로 변화 하였다니.........

바울의 전도를 통해서 변화했던 그 땅,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 오랜동안 기독교문화를 꽃 피웠던 그 땅이 이제는 복음의 불모지가 되고 모슬렘들의 유럽의 관문국가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앞에 얼마나 충격이 되었는지 모른다. 1989년 여름 그것은 나에게 실로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또 나에게는 잊을수 없는 경험이 있다. 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을때 한 청년이 관심있게 다가와 이야기를 나누어 서로 소개를 하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다음날 주말에 자기집에 초대학고 싶다는 것이었다.

팀 리더에게 이야기를 하고 토요일 나는 터키인 형제와 함께 그의 집에 방문하였는데 그곳에 20여명 정도의 터키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소개를 받았는데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아버지는 나를 정말로 반갑게 맞으면서 터키식 인사로 내 뺨에 다섯번이나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영어가 자유롭지 않은 아들의 통역으로 우리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지만, 사연인즉 아버지가 한국전 터키 참전용사시고 한국전에서 왼쪽 팔을 잃어 버린 상의용사 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분은 오랜동안 한국을..그리고 한국 사람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 우리는 한국인을 형제처럼 생각한다" 는 그분의 말....다시한번 나는 부끄러웠다.

나는 한번도 터키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또 한번의 부끄러운 경험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무엇인가에 얻어 먹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수련회끝에서 오엠선교회의 선교사 입문을 하는 곳에서 수련회를 하는데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행히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과 2주의 시간이 비워 있었다. 나는 선교에 대하여 더 알아야 겠다는 생각에 자원봉사자로 지원을 하였고 네덜란드 De Bron이라는 곳에서 진행되는 오엠 선교사 수련회에 참석을 하였다. 나는 Informationa Desk에서 일을 하면서 저녁에는 집회에 참석을 할수가 있었다.

300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오엠의 단기선교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 2주간 동안 수련회를 갖는 것이었다.

뜨거운 찬양, 그리고 전시장 안에는 오엠의 필드들이 자기들의 사역을 소개하는 필드부스가 곳곳에 설치되어 호객(ㅎㅎ?) 행위를 하였다. 즉 자기 필드로 선교사들을 한명이라도 더 모집하기 위해서 상담을 하고 도전하는 일종의 선교전시장인 셈이었다.



때마침 그곳에는 한국외항선교회를 통해서 그해 오엠을 조인하는 한국인 선교사들이 있었다.

나는 아직 4학년 학생이었고 나는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더 두든 거리기 시작하였다.

나의 모든 선입관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 나는 선교사를 연상할 때 마다 벽안의 푸른눈을 가진 서양 선교사를 생각했고,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한국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참 많이 하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런 분들이라고 믿었다. 나같은 평범한 사람은 참 먼 이야기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만난 한국 선교사들, 또 많은 서양 선교사들은 참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목사 안수도 받지 않았고 심지어 신학교를 나온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요리사 출신도, 은행원도, 교사도, 의사도, 목회를 하던 목사도 그러나 그들에게 동일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직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수많은 이방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으로 깨닫고 반응하였다는 것이 그들에게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일치점 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서 터키 필드 리더와 상담을 하였다.

그러자 그는 터키에 나와 같이 제자훈련 사역을 할 수 있는 기독교 교육가가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영어를 잘 할 줄 모르고, 그리고 터키어는 알파벳도 모른다고 그러자 그는 자기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지금의 내 영어정도면 팀 생활하는데에는 어려움이 없고 그리고 터키어는 와서 배워도 늦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나는 내가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하자....그는 말하기를 주님이 마28:18 절에서 말씀 하신 것은 명령이지 내가 선교사의 은사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주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라고 말하였다.

실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다른 어떤 이유로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었다.

그러자 나는 " 아직 한 학기가 남아 있습니다. " 그러자 당연히 학교를 마치고 바로 터키로 오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학교에 돌아가서 기도하고 준비하겠다고 말을 하고 상담을 마쳤다.

그리고 나는 가을 학기 나의 마지막 졸업 학기로 돌아왔다.

변한 것이 있다면, 나에게는 다른 어느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 고민 하나를 안고 돌아 왔다는 사실 이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다짐을 하였다. 하나님 내가 지금 당장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지만 내가 열방을 향한 기도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선교에 헌신한 친구들과 특별히 이슬람권 사역에 관심이 있었던 최, 진, 강 (모두 다 지금은 선교사가 되어 있지만) 친구들과 같이 이슬람중보 기도 모임 활동을 시작하였다.

화요일 금요일 채플 시간에 모슬렘 인구가 90%가 넘는 나라들을 선정해서 세계기도정보" 책자를 통해서 그 국가에 대한 기도정보를 번역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나누며 친구들과 함께 기도 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기도를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더 크게 이슬람권 나라들 사람들 특별히 터키를 향한 마음의 부담이 커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민이 되었다.

첫번째는 나는 언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영어에 대한 두려움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는 두려움....

그리고 두번째 내가 더 준비되어여져야 하고 공부를 더해야 할것 같은 두려움이 내게 있었다.

세번째 홀로 남으실 엄마에 대한 걱정과 후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난 단 한번도 집을 떠나 본 적이 없었는데 과연 내가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Q.T를 하는데 그날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을 묵상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장이고 특별히 전도와 선교에 대한 메세지를 할때 마다 사용하던 본문이었기에 의례적으로 읽고 묵상하고 있을때 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 성령님은 새로운 시각으로 한 말씀을 발견하게 하였다. 즉 17절 말씀에 "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자들도 있더라......"

어 ? 이상하다 내가 그토록 자주 읽고 심지어는 인용하며 설교하던 본문인데....그런데 그 날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17절 말씀에 " 아직도 의심하는 자들도 있더라.." 하는 것이었다. '

그 그날따라 그 말씀이 마치 현미경으로 확대하듯 아주 큰 글자로 내 눈앞에 보여지는 것이었다.



바로 그날 나는 주님앞에 그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나는 어떻게 선교사가 되는줄 알지 못합니다.

저를 도와 주십시오 !!!!!!!!!!!!!!!!!!



그리고 마치 이미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함께 했었던 제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심하고 있는데 저도 주님 저에게는 많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는 영어도 할줄 모르고 더더욱 저는 아직도 해야할 공부도 다 마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이 원하신다면 주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학교 도서관 뒤의 성주산 조그만 바위위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날 내 씨름을 멈추었다.

주님은 내게 그런 깨달음을 주신 것이다. 즉 주님의 지상 대 위임명령을 받는 제자들이 어떠한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그 명령을 하고 있는 이가 누구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가라고 명령하기 이전에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진 이 " 가 누구인가를 제자들에게 확인하셨다.

그 동일한 주님이 내게 말씀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명령은 심지어는 의심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도 말씀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20 절 말씀을 통하여서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선교사님은 선교사의 Calling을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 나는 이 질문을 받을 때 나는 저는 마태복음 28잘 17절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 아직도, 다른 성경에는 더러는 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의심하는 자들도 있더라...."

그런데 주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진 분이신데 그 분이 모든 족속으로....저에게는 터키의 모슬렘들을 위하여 가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나는 아직도 선교에 헌신한 많은 젊은 이들이 분명한 선교 부르심에 대한 확증과 확인을 기다리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환상이나 비전이나 예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늘도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그 분의 음성을 듣는 일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아니 가장 중요한 질문이 우리에게 있다.

나는 주님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주님이 주님의 제자들에게 어떤 명령을 주셨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심지어는 의심하며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조차 주셔야만 한 가장 위급한 명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