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9일 목요일

당신의 안전 지대를 떠나라 !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



아브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 지금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라는 음성을 듣는다.



노년의 나이에 자신이 정착했단 곳을 떠난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인간이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심리적인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분리의 두려움이라고 한다.

아기들은 가장 본성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들을 살펴보면 아이들이 제일 두려워 하는 순간이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이다. 엄마의 얼굴이 보이지 않은 것이 자신이 엄마로 분리 되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분리가 가져다 주는 두려움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장 재미 있어 하는 놀이가 소위 "까꿍" 놀이이다. 엄마나, 누나가 눈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서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아이의 긴장됬던 마음이 녹아 내리고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띄는 아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를 얼마나 미소짓게 하는 일인지 모른다.

사랑하는 존재가 눈 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아가의 표정이 긴장감에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 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 다음 아이가 자라나서 좋아하는 놀이가 술레잡기라는 놀이다. " Seek and Hide " 라 불리우는 이 놀이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다 존재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아이들은 구석진 곳을 좋아한다. 장농속이든, 책상 밑이든, 그리고 남자 아이들은 나무밑에 나무 가지들을 꺽어서 만들어 놓은 자신들만의 비밀스런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무의식 가운데 모태 가운데 있었던 그 환경을 만들어 놓으며 안전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이가 태줄을 끊고 세상에 나오는 것은 실로 하나의 충격이다.

마치 우주선이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 날 때 엄청난 충격을 경험하는 것처럼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충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최초의 분리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분리를 두려워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신이 자라나고 태어났던 고향을 찾는 귀소 본능이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이 에덴에서의 범죄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 가운데 하나인 죽음의 형벌을 예견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죽음" 이란 바로 분이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지는 두려움, 자신으로부터의 분리인 것이다.

그러기에 분리란 고통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인간의 업보 가운데 하나를 헤어짐" 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정착하여 살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 하신다.

왜 일까?

하나님은 왜 이 노년의 남자인 아브라함에게 떠나라는 명령을 하신 것일까?

그가 젊은 청년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왜 가여운 이 노년의 남자인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광대한 뜻을 이해할 길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이해하고 따를 하나님의 친구를 찾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창세기 첫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 하시고 주신 명령 가운데 하나가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 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땅에 충만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지속적으로 흩어지고 이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창 11:4 절에 보니까 "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라며 하나님의 계획에 반기를 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끝임없이 안전을 추구한다. 설령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대치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안전지대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성을 쌓음으로써 자신들을 보호하는 그들의 안전지대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산성이고 보호이시기를 원하시는데도 말이다.



몽골의 위대한 정복자 징기스칸은 그의 아들들에게 " 성을 수축하면 망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

역사에 보면 터키족의 조상이었던 돌궐족의 장수였던 돈유쿠크는 그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새겼다고 한다.

" 길을 뚫는 자는 번영하고 성을 쌓는자는 망한다. "

아 얼마나 놀라운 통찰력인가..............? 유목민이었던 몽고족이 성을 쌓아 정착함으로 유목민족의 기질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한 징기스칸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정복자들이 성을 쌓다가 망하였는가............

인공위성에서 조차 쉽게 분별해 낼 수 있었던 만리장성을 쌓던 중국의 왕조는 성을 쌓으며 망하여 갔던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고향을 떠나라고 하신다. 그의 가족을 떠나라고 하신다.

그리고 어디 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 하신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두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가야할 목적지도 분명하지 않은 여행을 떠나는 그것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여행이 아니라 돌아옴이 약속되지 않은 여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구하시는 구원의 방편 이었음을 생각해 본다.

그가 살고 있었던 갈대아 우르는 그 당시에 물류가 교통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월신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땅이었음을 창11장 후반부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물질주의의 노예로 살아 갈 수 있었고, 여호와 하나님과 상관없는 다원주의적 사고에 길들여저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아야 했을 지도 모른다.



1. 떠남은 우리에게 가야할 목적지가 필요로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가 있어야 함을 알려준다.

우리는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장소를 떠나 볼때,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가치와 목적이 필요로 함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집을 떠 날때 목적지 없이 떠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있는 것을 버리라 하실때면 다른 것이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며, 우리로 하여금 있는 곳을 떠나라 하시면 가야할 곳이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 떠나라" 는 음성을 들을 때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실 곳을 향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2. 떠나라 하시면 그것은 동행 하시겠다는 뜻이다.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말씀 하셨다. 그리고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고 말씀 하신다.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님이 보여준 땅이 아니라 보여줄 땅이라 말씀 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은 주님이 우리가 당도해야 할 그 땅에 도착하게 되기까지 주님이 함께 동행 하시겠다는 것이다.

왜 나는 한번도 그 생각을 미처 해 보지 못했을까........?

왜 나는 그것을 두려움이라고만 생각하고, 어쩌면 하나님이 참 심술 굿은 아버지의 모습만을 떠 올린 것일까? 왜 나는 그것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총이고 사랑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두려움으로 떠나지만 아브라함이 그 긴 여행동안 하나님 아버지와의 긴밀하고도 친밀한 대화와 교제가 그리고 그 분의 공급하심이 함께 따랐음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그 길이 얼마나 달콤한 하나님과의 밀월의 시간이었음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브라함을 떠나라고 하실때는 그 말은 하나님이 그와 동행 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을 .......

이 생각에 미치자 나는 마태복음 28:18-20 절까지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을 남기실때

주님도 가라고 말씀 하시며........후반절에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시니 말이다.

떠나라고 하시는 말씀은 동행하시겠다는 그 분의 약속이 있음을 생각해 보자.



3. 우리는 떠 날때 비로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어떤 맘으로 자기의 집을 떠났는지 그의 속을 알수 없지만.....그가 갈대랄 우르를 떠나 하나님가의 동행에 나섰을 때 아르라함은 그가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축복을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대근동의 역사에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는 거부가 되었고 주변 민족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가 떠나는 것을 거부하였다면 그는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그가 누렸던 수많은 축복, 그리고 그가 평생에 갖지 못했던 자신의 후사를 잇는 이삭을 얻는 놀라운 기적을 그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1989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 떠남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나는 크고 작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주님의 역사와 일들을 볼 수 있었다. 전쟁중인 이락의 최 전선에 서보기도 했고, 선교의 중심이었던 영국의 런던의 한 복판에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경험해 보기도 하였다.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경험할 수 없고 누릴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을 ......



어느날 베드로와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갈리리 바다를 여행 한다. 밤이 되자 날씨는 급변하여 바다에 놀라운 폭풍이 몰아친다. 그 때 바다위로 예수님이 걸어 오신다. 모두들 유령인줄 알고 두려움 가운데 있을때 베드로는 주님께 말한다. 주님 당신이거든 저를 명하여 물위를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

참으로 황당한 요구이다.

그런데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위를 걸으라 명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것은 보트를 떠나는 것이다. 보트를 걸어나오지 않고서는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 기적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떠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놀라운 역사를 경함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믿음으로 비전을 품고 보트를 떠나 나올 때 우리는 비로서 물 위를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의 비밀인 것이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앞으로 20년 후에 당신은 저지른 일보다는 저지르지 않은 일에 더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밧줄을 풀고 안전한 항구를 벗어나 항해를 떠나라.
돛에 무역풍을 가득 담고 탐험하고, 꿈꾸며, 발견하라.” 고 했다.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나이 74세에 유명한 철학 책인 『순수이성비판』과『실천이상비판』을 썼다.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는 85세에 명곡 “아베마리아”를 작곡했다. 시인 테니슨은 80세가 되어 “죽음을 향해”라는 시를 세상에 내놓았고. 괴테는 80세에 역작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안에 더 새로워지고 온전해지기 원하는 꿈이 있느냐이다.



그렇다.

우리가 우리 가슴에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이루기를 꿈꾸는 꿈이 있다면, 두려움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전지대를 과감히 떠나야 한다.

그럴때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경험하며,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크고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주의 음성을 들으며 당신의 안전 지대를 떠 날 준비가 되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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